살 만큼 살다가 죽었더니 10살 생일날로 돌아와 있었다
1화
작가 제가
일러스트 착한 사람 눈에만 보입니다
잠과 죽음은 그리 멀지 않다는 것이 세간의 상식이다. 나 또한 이를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고 그래서 잠에서 깨어나듯 어둠으로부터 영혼이 일어나 마침내 눈을 떴을 때 별로 놀라지 않았다. 가장 위대한 영웅마저 죽어서 혼백으로 돌아가면 거세된다던 힘과 맥박, 뜨끈한 두통이 아직 육신에 머무른다는 점은 놀랄 일이었지만. 물론 놀랄 일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내가 태어나지는 않았으나 어느 정도까지는 자라난 숲속 작은 집에서 요까지 잘 덮고 누워 있는 채였다. 살짝 놀라긴 했지만 나에게 일찍이 사후의 세계는 이러니저러니 미리 일러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기왕이면 태어난 숲에서 깨어났으면 좋았겠지. 이제 일어났을 뿐이다. 그러나 벌써 저승의 강변을 철썩거리는 물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후회 따윈 없다. 나는 생자에게 허락되지 않은 너머로 향한다. 얼굴도 모르는 부모를 찾아야지. 내 친척들도 찾아야지. 정말로 닮았는지 확인할 거야. 그 다음엔… 흥분감이 피를 따라 온몸으로 따뜻하게 퍼졌다.
나는 살아서 내 곁에 머무르는 자들을 충분히 사랑하였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은. 누가 나에게 손가락질하길 애정이라는 게 남아있다면 말이다. 나는 그 비난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나는 그들보다 강했다. 그래서 죽였다. 그러나 말년에 이르러 약해진 나머지 이름 없는 자에게 죽었다. 생김새도 제대로 보지 못했지. 그가 나보다 살짝 더 빨랐나 보다. 젊었을 때였으면 피했을 텐데. 그래서 죽었다. 나를 죽인 이름 없는 이는 나에게 경의를 표할지도 모르겠으나, 어쩌면 별 자랑거리도 못 된다며 털어낼지 또 모르는 일이다. 늙은이를 죽여봤자 그것이 업적이 되겠는가. 어쨌거나 그는 나를 멋대로 부를 권리가 있다.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 나와 이런 종류의 원한은 강물의 끝과 끝보다도 먼 감정이다.
나는 내 곁에 머무르다 결국은 떠나간 자들을 충분히 기억하였다. 역시 내가 할 수 있을 만큼은. 어떤 자가 한탄하길 나에게 기억력이라는 게 남아있다면 말이다. 이에 대해서는 나도 할 말이 있다. 중요한 건 다 기억하니까. 개중에서도 어릴 적에 나를 할퀴고 간 죽음들을 특히 더 기억한다. 난 평생 마음을 사용하기만 계속했지 무기처럼 항시 날카롭게 벼리지는 못했다. 어둠이 머무르지 못하는 가슴에 슬픔이 고일 틈도 없다. 시간이 지나고 팽팽한 살가죽에 사선이, 촘촘한 머리털에 빈자리가 더해지며 나는 죽음 앞에서 제법 무던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내 차례다. 삶을 떠나 죽음으로 왔다. 저승에서 혼백으로 머무르며 아직 날 떠나지 않은 기백을 모조리 소진했을 즈음에 내가 남겨놓은 이들이 돌아오리라. 그때가 오기까지는 날 환영하는 얼굴들에 둘러싸여 지내면 될 일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나와서 앉아라.”
문을 열자마자 들려온 말이다. 그가 나를 등지고 앉아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괴물, 동시에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사람, 다시는 어머니라 부르지 않겠다고 내가 한 번쯤은 맹세했던 아폴론의 추악한 피조물. 내 손으로 두쪽 내서 죽인 나의 양어머니. 내 몸을 내려다보기 위해 본능적으로 다시 문을 닫았다. 스테넬로시아가 이상을 감지했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나도 몰랐다. 심장이 뛰고 머리는 뒤를 얻어맞은 듯 둔중하게 울린다. 그제서야 내 몸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문간을 짚은 나의 손은 여렸고 다리가 망아지처럼 가느다랗다. 내가 지나온 삶이다. 수십 년의 세월을 지나 기억조차 아닌 상상으로 퇴색되어가던. 황당이 당황으로 당황은 몽롱한 충격으로 이어진다. 꿈일까? 시험일까? 나는 대개 앞일을 예상하지 않지만 너무한 상황이다. 하나, 둘, 셋, 이 정도면 충분한 시간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이것이 무엇이든 이 방 안에 매여있을 수 없다. 한 발짝 앞으로 걸어 나간다. 벽에는 내가 평생 귀중하게 여겨오던 이지창이 기대어 있고 스테넬로시아는 여전히 돌아보지 않은 채 야채를 손질한다. 뭐라고 말을 꺼내야 좋을지 모를 지경이다. 증오와 독이 목구멍을 감돌다 맥없이 풀어진다. 이토록 어리고 작은 육신에 깃든 영혼은 나이를 많이 먹었다. 나는 내 무기 앞으로 걸어갔다. 새것이다. 한 손으로 들려고 했지만 나는 어린아이다. 두 손으로 들면 그럭저럭 휘두를 만했다. 적어도 누구를 죽일 정도는 되었다. 난 살인을 망설인 적이 없다. 지금은 더 그렇다. 그러니 누구든 쉽게 죽일 수 있겠지.
“네 선물이란다.”
선물을 주는 사람 치고는 지나치게 고저가 없다. 나는 이 날을 격렬한 통증처럼 기억했으나 속삭임처럼 고요하다. 다른 여느 날과 같았다. 내 마지막 기억 속의 집은 어땠지? 작은 공간이 신혈과 포도주로 완전히 젖고 나는 아마 비명을 질렀던 것 같다. 그날의 기억은 잘 나지 않으니 어느 정도는 정말로 내 상상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약간 고통스럽게 스테넬로시아를 돌아보았다. 내가 어렸다면 바로 울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오히려 웃었다. 내가 그토록 의지하고 두려워하던 존재는 이렇게나 젊었다. 곱슬거리는 갈색 머리카락을 묶거나 땋을 줄 모르고 그대로 늘어뜨린 평범한 아낙 같은 여자가 나의 웃음에 살짝 미소한다. 나는 몸이 기억하는 대로 스테넬로시아를 따라 평범한 아침을 보냈다. 누군가 숲을 침입하지는 않았나 정찰하고, 내가 비록 스테넬로시아보다는 작으나 어지간한 인간 장정만큼은 성장했으므로 새로운 생일 선물을 가지고 놀았다. 이 무게가 조금 버겁게 느껴진다는 사실이 신선해서 하루 종일 처음으로 재미를 느끼는 순간이었다. 무기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스테넬로시아는 물건 따위에 이름을 지어주는 성품이 아니다. 나도 그러하다. 그는 다만 나의 움직임에 놀라워하였고 나는 어린아이처럼 뻐겼다. 그는 내게 살인해본 적 있는 자처럼 창을 다룬다고 했다. “그러는 어머니는 참살자이시죠.” 어머니라고 스테넬로시아를 부르니 입안이 까스라웠다. 그러자 스테넬로시아가 이렇게 말했다. “너는 영 이상하구나.” 당장 내 머리를 부술 수 있는 손이 내 머리통을 부드럽게 쓸어내린다. 나는 그때쯤 이건 모두 어떤 꿈이고 시험을 통과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린 참이었다. 그래서 그대로 대답했다. “시험을 기다리고 있어요.” “하룻밤 새 자란 것 같네. 그것도 훌쩍.” “어머니에게도 시험이 있죠.” 그러자 그는 뜻밖의 지적사항을 들은 꼬마 전사처럼 눈을 크게 떴다. 나만큼이나 고통스러워했으며 나를 조금 더 잘 기억하기 위해 얼굴로 손을 올렸다. 그것이 시험치고는 진짜 같았다.
“내겐 의무가 있다.”
“하세요.”
나 또한 스테넬로시아의 얼굴에 손을 올렸다. 진짜 같다는 생각이 끝나질 않아서. 또 이런 생각도 했다. 스테넬로시아는 타르타로스에 떨어져 영원히 오늘을 반복하고 있는가? 내가 스테넬로시아의 지옥에 온 걸까? 누구의 안배로 그렇게 되었을까? 스테넬로시아는 겁에 질려 보였다. 스테넬로시아의 지옥은 바깥에서 얼마든지 들여다볼 수 있도록 만드는 게 좋았을 뻔했다. 참으로 장관이렷다.
“어디까지 아니?”
“상관없어요.”
스테넬로시아의 고백은 쉰 살은 족히 먹은 나에게도 괴롭고 길었다. 한번 겪었지만. 세상에 평생 사랑하던 양어머니가 사실은 네 부모를 찢어죽이고 아기를 강탈해서 여태껏 키웠다는 사실을 듣고도 아무렇지 않을 사람이 많을까. 당신들은 내가 언제 즈음에 이런 긴 얘길 해주고 있는 건지 지금쯤은 궁금하겠지. 나는 오늘을 이렇게 줄이겠다. 나는 다른 선택을 하지 않았다. 나는 스테넬로시아를 그때와 같이 두 쪽으로 갈라 죽였다. 아폴론이 아니라 아폴론의 할아버지 크로노스가 와도 이 선택을 바꾸지 않으리라. 스스로 죽고자 하는 나약한 영혼에게 자비란 사치다. 살아서 고통에 겨울 여유 따위 주지 않겠다. 나는 그를 사랑할지언정 용서할 수 없다. 수천 번 나를 이 날로 돌려보내도 같다. 일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기다란 창대를 따라 피가 흐르며 손을 미끄러지게 한다. 바투 잡고 더욱 깊게 날을 꽂는다. 스테넬로시아가 태어난 최초의 형태, 육신이 신혈과 진흙으로 분리될 때까지 깊게 갈라서. 그러나 난 그러고도 숨이 붙어 겨우 넘어갈락 말락 하는 그에게 한 마디를 할 겨를이 있었다. 이번엔 그러고 싶었다.
“많이 아파요?”
그러자 입가에서 피거품이 끓으며 뻐끔거렸다. ‘생각보다 더.’ 다분히 충동적으로 묻는다.
“나도 비슷하게 죽었었어요. 이것도 집안 내력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대답은 들을 수 없었다. 뼈가 부러지며 등을 완전히 뚫더니 날 끝이 흙바닥을 조금 파낸다. 내 인생에서 아폴론의 비중은 그렇게 크지 않으니 다음 기억은 빠르게 넘기도록 한다. (난 아폴론 덕을 많이 봤지만, 눈앞에 나타나지도 않는데 소중하게 여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평소에 의식은 자주 해도.) 시신을 보자마자 분노에 얼룩진 신성한 얼굴이 벼락처럼 맹렬하게 일그러졌고 나는 신 대신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눈물을 닦아내면서도 이 축축한 슬픔이 내 것이 아닌 그의 것임을 알았다. 새하얀 머리카락이 검게 물든다. 어떤 상실은 대체되지만 종종 영원한 결핍으로 남는다. 내가 죽으면 끝나려나 싶은 침묵. 그리고 아폴론이 축 늘어진 딸을 데리고 떠나간다. 난 그때까지만 해도 이것이 모두 시험이라고 생각했다. 곧 산산이 부서질 거라고도. 창 한 자루 꼬나쥐고 빈 숲을 박차고 나와 무작정 길을 걸었다. 누가 나타나 사실 네가 보고 들은 일은 모두 환상이라고 설명한다거나 하는 그딴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기까지는 꽤 오래 걸렸다. 이 삶은 저주인가 싶기도 했다. 난 내가 알던 사람을 누구도 만나지 못했다. 어린 켄타우로스에게 친절하게 대해준 자들을, 기꺼이 가진 것을 베푼 자들, 친구가 되어준 자들을 찾아 헤매었다. 그러나 누구도 보지 못했다. 날짜가 달랐다. 행선이 달랐다. 언제는 한 자리에서 계속 기다리기도 했다. 그럼 그들은 다른 길로 갔는지 통 오질 않았다. 이번엔 빛이 주어지지 않았기에 난 더더욱 이 삶이 형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룩한 모든 것을 새로 쌓아야 했다. 내 아이들마저도. 단 한 개의 선택이라도 어긋나면 난 그들을 다시 만나지 못한다. 이전 삶에서는 어렵게 시작해 쉽게 살아갔으나 이번에는 쉽게 시작해 갈수록 꼬이고 어려운 길을 걸어야 한다. 거기까지 도달하자 난 한동안 그럭저럭 살았다. 마모되는 정신에 한 가지 생각이 번개처럼 내리꽂힐 때까지.
내가 지나온 길은 언제나 날씨가 나쁘지 않았다. 비는 머리를 감고 목을 축일만큼만. 바람은 부드럽게. 햇빛은 달콤했지. 어디로든 내가 원하는 대로 갈 수 있도록. 나는 최선의 길을 걸었다. 그 길을 선택했다. 선택하기 이전에 알고 있을 때도 많았다. 나는 선택하기도 전에 찾아오는 앎을 무엇이라고 부르는지 잘 안다.
아폴론이 날씨를 관장하였겠는가? 아니… 눈을 감았다 뜬다. 아니… 절대 아니지. 아니야. 그럼 뭐겠어. 나는 언제나 미리 알고 있었어. ‘어디로든 내가 원하는 대로 갈 수 있도록.’ 관자놀이를 슬쩍 문지른다. 예전처럼 우울한 어린애인 난 하늘을 보며 약간 까탈스럽게 미간을 찌푸린다. 조금 돌아서 가야겠어. 그리고 그때 본 대머리 남자에게 배를 태워달라고 해야지. 그는 멀리 간다며 투덜대더라도 적당히 삯을 치르면 그러마 하리라. 손을 떼고 손바닥을 들여다본다. 무언가 그 안에 보이기라도 할 것처럼.
“왜 나에게 예지를 주었나요?”
그것도 예지치고는 하찮은 것으로요. 예전에도 이런 식으로 내게 선물을 주었죠. 까마귀가 운다. 니케포로스가 걷는다. 새로운 삶을 산다. 어떤 소설 속의 진부한 줄거리, 그러나 무엇과도 같지 않은 스토리라인을. 어디로든 니케포로스가 원하는 대로 갈 수 있도록 뜬 눈 말고 감은 눈 안쪽을 비추는 아주 자그마한 빛과 함께. 나의 예지는 어디부터 어디까지인가요. 하는 물음도 같이. 나는 내가 원하는 어디로든 가서…
다음 화는 구매 후 감상 가능합니다. 소장권을 결제하시겠습니까? | |
소장권 (200캐시) | 대여권 (100캐시)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