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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0/니케포로스

N-4

by 곽제가 2021. 7. 26.

니케포로스&아이스킬로스&토감

 


 

한 머리털 하얗고 몸은 노오란 꼬마 켄타우르스가 숲길을 내며 걷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키릴이다. 어머니가 지어준 이름은 아니다. 그는 이름이 노래로 지어지기에는 짧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마음에 들지 않는 이름도 아니었다. 평생이 길진 않으나 평생 키릴로 살았다. 이름 따위보다 신경 써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이름 가지고 마음에 드니 안 드니 트집을 잡는단 말인가. 농담이 아니라 할 일이 정말로 많았다. 가령 갑판을 청소하는 것. 하늘과 바다를 배우는 것. 허드렛일. 청소. 수업. 갑판을 청소, 이미 말했군. 이게 다 철없고 힘만 센 어머니 때문이다! 같이 바보가 되어가는 것 같다. 어머니는 키릴이 노는 꼴을 가만히 보는 법이 없어서 낚시를 하거나 갑판 맨 아래에서 노를 저었다. (진실을 말하자면 배에선 놀 거리가 단 하나도 없다. 친구라도 한 명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그놈의 어린 시절 얘기를 어찌나 자주 하는지 허구한 날 자긴 친구 없이 잘 컸다고 우겼다. 선원들과 놀라고만 한다. 선원들은 친절하긴 하지만 죄다 아저씨 아줌마가 아닌가? 그리고 할 말이 하나 더 있는데, 저게 잘 자란 건가? 항상 의문이 든다.) 어머니는 또 어렸을 때 밥을 못 먹었나 입만 열면 식충이, 밥벌이, 밥값에 어찌나 집착하는지 섬에 정박할 때마다 그를 시켜서 사냥을 해오라 시켰다. 좀 커서 머리가 굵어지고 용기가 솟아나 그 의견을 전달했더니 어머니는 “어쩌라고”로 응수했다. 안타깝지만 아직 어머니를 이길 수 없으니 입을 다무는 수밖에. 참고로 이 의견도 전달하였는데 어머니는 “하! 네가!”라며 지나갔다. 그리고 자긴 열 살 때 이미 어지간한 장정만큼 컸다고 우겼다. 언제나 그렇듯이 허풍이 틀림없다. 그게 무슨 열 살인가? 열다섯도 아니고 열 살이라니 키릴을 아주 바보로 아는 게 틀림없다. 

 

생각하며 걷다 보니 뭘 잡는 것도 잊었군. 바로 나무를 끼고 돌아선다. 순간 짧게 박새 울음소리가 났는데, 운이 좋아 둥지가 있다면 새끼 새를 구경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키릴이 마주친 건 하얀 새와 닮은 남자였다. 이름 없는 하얀 새는, 말하려니 소개하기 어렵다. 어쨌든 키릴과 색이 약간 다르고 모양도 미세하게 다른 초록색 눈을 가졌다. 둘의 눈을 섞으면 저 남자와 비슷하겠다. 남자가 키릴을 바라본다. 아니, 같다. 확신이다. 두 시선이 섞였다. 키릴은 용감하지만 낯선 남자가 무섭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남자가 엷게 웃자 그런대로 근거 없는 자신감이 들어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아기새를 잡으려 했는가요?”

“그저 보려고 했어요.”

“착하군요.”

“아뇨.”

 

 

단호했다. 평소라면 그러지 않겠지만 키릴이 선심 써서 부연했다. 

 

 

“오히려 당연해요. 치어를 먹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그러자 다시 한번 웃은 남자가 손짓했다. 어차피 그리로 가던 길이었다. 게다가 무슨 일이 생기면 이렇게 약한 남자는 거의 찢어질 게 뻔했다. 지금도 어머니가 키릴의 흔적을 문질러 없애가며 오고 있을 것이다. 둘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남자가 천천히 손을 들어 그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키릴은 아홉 살짜리 중에서는 단연 가장 키가 컸지만 이 남자에는 한참 모자라다. 남자는 가까이에서 보자 장난기가 있고 이상하게 기특한 눈치도 엿보였다. 그는 얼마나 멀리까지 화살을 쏠 수 있느냐 물었고 키릴이 대답하기를 아직 훌륭한 사냥꾼이라기엔 어려서 작게 그리 멀진 않다고 했다. 그러자 그가 자세를 잡아보라고 말했고 팔꿈치의 각도와 손가락을 고쳐 주기도 했다. 잠깐 불평을 했으나 키릴은 좋은 학생이다. 말대로 하자 정말로 사정거리가 멀어진다. 다시 만나지는 못하겠지만 그것만으로도 오랫동안 좋은 기억으로 회상할 만치 괄목할 만한 발전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족할 만큼 화살을 쏘고 새를 가지러 다녀온 키릴이 뒤늦게 남자에게 이름을 물어보려고 할 찰나 남자가 정말이지 갑자기 이러는 것이 아닌가.

 

 

“니케포로스는 힘이 세고 팔이 길며 몸기술을 저절로 체득했지요. 그런 이를 그대로 따라하기엔 아직 멀겠어요.”

 

 

키릴이 깜짝 놀란다.

 

 

“저희 어머니를 알아요?”

 

 

남자가 또 웃는다. 골이 나 왜 웃냐고 발끈하자 더 크게 웃는다. 어이없어! 그리고 화내려는 찰나,

 

 

“키릴!”

 

 

어머니가 그를 찾았다. 마침 잘 왔다, 키릴이 손을 크게 흔들고는 얼른 남자를 붙잡는다. 붙잡았나? 왜 손에 아무것도……

 

 

“없네?”

 

 

허무한 숨이 흩어진다. 키릴과 생김이 많이 닮은 여섯 다리 켄타우르스가 걸어온다. 관찰력이 어찌나 좋은지 두 마리나 잡았으니 하나는 자기가 가져간다 설레발을 치면서. 키릴은 거기에 대거리할 생각도 하지 않고, 엄마, 나 숲에서...

 

 

“낯선 사람 봤어.”

 

 

했다. 이마에 짧은 입맞춤이 돌아온다. 경험상 개소리 말라는 완곡한 표현이었다. 그래도 핀잔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우기기보다는 비밀로 간직하고 싶었다. 이유는 모른다. 그냥, 이건 키릴이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말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냥. 이번만큼은 그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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