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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0/니케포로스

N-5

by 곽제가 2021. 7. 26.

니케포로스&아이스킬로스

 


 

“그는 크레타의 왕자다. 걸맞은 공간을 요구한다. 값은 치르겠소.”

 

바닥이 흙펄이라 어지간한 장정도 무릎이 꺾이기 십상인 강풍이었다. 바람이 정신없이 불다가 아마포 머리끈을 가져간다. 미처 잡을 새도 없이 나부끼며 허공으로. 니케포로스는 포기가 빠르다. 머리끈 대신 뺨이며 어깨를 때리는 머리카락을 한 손에 갈무리했다. 창날에 머리카락이 감겨서 그러다 몇 가닥이 끊어지기도 했다. 노인은 낯이 냉정하면서도 어린 티가 군데군데 남아 있는 여섯 다리 켄타우로스와 왕자라기엔 때깔이 곱지만은 않은 청년을 번갈아 보다가 알겠다며 몸을 돌린다. 해적이나 다름없는 에우테르페의 주인에게라면 몰라도 크레타의 왕자라면 방을 내어줄 용의가 있었다. 그의 집은 어디 가서 저택이라 할 만큼은 아니나 다른 집보다 층고가 한참 높고 방이 여러 개 있었다. 그러나 주인 되는 이가 객에게 방을 내어줄 만큼은 인정머리 있었지만 두 개나 내어줄 형편은 아니어서 문이 닫히고 나자 좁다는 기분을 지우기 힘들다. 뛰면 천장에 정수리가 닿을 니케포로스가 그랬고 시선을 어디에 두든 그 덩치가 시야에 크게 차지하게 되는 아이스킬로스도 마찬가지였다. 이제쯤 앉으려다가 문이 열린다. 더러워 죽겠다는 경멸의 눈초리와 함께 비바람 치는 바깥에서 물을 부어 몸을 깨끗이 해야 했다. 늙은 여자 하인은 니케포로스가 무서운지 물을 부어 주면서 눈을 내리깔 뿐이었는데 아이스킬로스는 어땠는지 물어보진 않았다. 니케포로스가 돌아왔을 땐 그가 이미 방에 들어가 있었기에 얼굴을 보자마자 물어보려는 마음이 휘발했다. 다른 용건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화로에 불 좀 더 올려.” 

 

바로 수그려 앉았다. 입을 벌릴 때마다 켄타우로스의 하얀 숨이 서로 구름을 포개듯 둥글게 겹쳐진다. 말 없는 이는 그것을 놓치는 법이 없다. “추우신가요?” “조금.” 그가 꼬챙이로 화로를 뒤집는다. 마른 나무토막이 부딪혀 통통 귀여운 소리가 났다. 두 사람은 하인이 가져다주는 음식과 음료를 마셨다. 홍합살과 야채를 다져 넣은 죽과 물에 포도주를 타서 데운 것이었다. 너그러워지고 몸이 풀리기 시작한다. 바깥 바람이 여전히 센지 건물 두드리는 소리가 크다. 오늘이나 아니면 내일까진 꼼짝없이 이 섬에서 보내게 생겼다. 바람 소리를 내도록 듣고 있으니 졸리다. 여섯 개의 무릎을 최대한 구겨 앉아 체온을 보존하다가 슬슬 바닥에 눕기로 했다. 사람의 마음이 간사해서 카페트를 깔아둔 자리에 머리를 두자 조금 푹신해졌다고 춥든 말든 그런대로 괜찮았다. 본래 어디 좋은 곳에서 잠드는 법 없이 갑판에 천 하나 두르고 눕고는 했으므로 퍽 만족스럽기까지 하다. 반면 다른 이는 조금 당황스러워 보였다.

 

“좁긴 하지만 이러실 필요는 없는데요.”

“난 추위를 덜 타. 네 생각보다도 덜. 그리고 나에게 예우를 차리는 거라면 필요 없어.”

 

말에 고저 없이 단조로운 어투다. 니케포로스는 그때까진 지금처럼 자주 웃는 성품이 아니었다. 불같이 화내거나 파도에 깎이는 바위처럼 고요하다. 오만할지언정 다정하지는 못했다. 누군가에게 기대더라도 말로 뱉지 않았다. 어떤 이는 니케포로스를 가여워했고 또 누구는 며칠 살지도 않은 게 왜 저러나 싶어했지만 어쨌든 대놓고 말하는 자는 없었다. 그는 필요 이상으로 잔인하기도 했으므로. 그러나 에우테르페에서만큼은 누가 말하면 듣는 시늉은 한다. 한쪽 손바닥을 짚고 일어나기로 했다. 몸이 비스듬하게 기울어져 있어 눈높이가 얼추 맞았다. 

 

“어쩌게? 어쨌든 둘 다 여기 눕진 못해.”

 

대답 없다. 그는 최대 가용 면적을 궁리하는 게 분명하다. 기다리기 싫어서 가늘게 뜬 눈을 더욱 좁힌다.

 

“그럼 옆으로 누워봐.”

 

잠깐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눈을 깜빡인다. 니케포로스는 웃지도 않고 부연했다. 어쨌든 자기 생각이 맞는 것 같았다.

 

“옆으로 누우면 공간이 절약되잖아.”

 

어떻게 들으면 자신만만하게도 들린다. 그러자 아이스킬로스는 ‘제가 옆으로 눕는다고 해서 당신과 제가 등을 댈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요?’ 같은 말이 또박또박 적혀 있는 얼굴로 주섬주섬 일어나 신발을 벗고 카페트 위로 올라갔다. 니케포로스가 뭘 생각하고 있는가를 이해하지 못해서 동작에 확신이 없다. 성질이 급해서 팔을 잡아당겨서 눕기 전 앉는다는 중간 과정도 없이 대충 쓰러뜨리고는 굴려서 등을 보이게 한다. 그리고 니케포로스는 조금 올라와 딱 어깨까지 카페트에 댔다. 그렇게 하면 정수리가 아이스킬로스의 긴 등에서 살짝 오목한 부분에 닿을락 말락 한다. 괜히 한 사람 새우잠 재워 불편하게 만들고, 나머지 한쪽은 아까랑 똑같다. 어쨌든 아이스킬로스는 등을 보이고 있으니 니케포로스가 어쩌고 있는지 일어나지 않으면 보지도 못한다. 그래서 팔을 뻗어 기지개나 켜기로 한다. 니케포로스는 별로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긴 했지만 아주 불편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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