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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0/니케포로스

끝내주는 이야기

by 곽제가 2021. 7. 26.

BGM: Agnes Obel- Riverside

 

https://www.youtube.com/watch?v=vjncyiuwwXQ&t=1s

 

 

 

지금부터 끝내주는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다들 앉아라. 오래 서 있으면 관절에 안 좋다. 아니다. 알아서들 해라. 잠깐이면 된다. 옛날 옛날에 이 할머니가 사람을 죽인 적이 있다. 사실 많다. 세어본 적 있냐고 물어본다면 없다고 대답하겠다. 놀랍지도 않다고? 야! 누가 참견질하라고 했어? 아까 그 말한 새끼 끌어내라. 알았다. 몰입에 방해된다고. 어쨌든. 지금부터 천천히 얘기해줄 테니까 잘 들어라. 내 이름은 니케포로스다. 지금은 아마 쉰 살쯤 된 것 같은데, 어렸을 땐 나이를 꼬박꼬박 잘 셌거든? 그런데 이제는 기억에 오차가 좀 생긴다. 기왕이면 어리게 보이고 싶으니까 한 마흔넷 쯤인 것으로 하자. 숫자도 쉽고. 나중에 기억력 좋은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된다. 마카이라는 육백 살이 넘어서도 자기 나이를 헤아리고 다니니까 나중에 만났을 때 물어보면 잘 대답해줄 거다. 기억이 안 난다고 하면 그냥 마흔넷이라고 생각해. 역사가들처럼 하루 단위로 정확한 시간 순서에 집착하지 말고. 난 그들이 좀 무섭더라. 나랑 안 맞아. 눈깔이 돌았어. 내가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기억이 안 나! 어쨌든 너희들도 알다시피 나는 상당히 오래 살았다. 내일 죽어도 자연사야. 그래도 너희가 내 얼굴을 기억하기에는 힘들겠구나. 너무 어려. 머리통이 하나같이 터무니없이 작아. 세상에 손주 보는 켄타우로스가 그리 많지가 않다. 나는 원래 다른 켄타우로스들과 다른 궤도를 타곤 했다. 우선 난 그들과 자라지도 않았어. 우림괴물이 기른 괴물로 태어나 열여섯 즈음에 영웅이 되었다. 열여덟 살이 되자 누가 날더러 새로운 영웅이 태어나는 것을 보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당연히 알았다고 했지! 그 사람은 지금도 찾아보기 쉽다. 저기 하늘을 봐라. 독수리자리 옆에. 파르테노스 아레포로이, 마지막으로 별자리에 오른 영웅이다. 세상은 이제 영웅을 파르테노스 아레포로이보다 못난 자와 어찌저찌 세워볼 정도는 되는 자로 나눈단다. 에우테르페 호의 여정은 너희들이 나중에 크면 누가 알아서들 귀에 못이 박히게 말해줄 테니 나는 하지 않으련다. 어쨌든 난 거기서 원래 알던 친구들을 잃었다. 난 그 후로도 많은 친구들을 잃었지. 날 둘러썬 인간들이 나만 빼놓고 죽어나갔어. 그건 어찌 보면 영생에 가깝기도 해. 나는 그래서 신들의 괴로움을 홀로 상상해보곤 했다. 그들은 계속해서 자식을 잃어야 하잖아. 아폴론께서 그러하였지. 나는 우림괴물 스테넬로시아를 이 창으로 꿰어 죽였으며 그는 나를 용서하여 나에게 빛을 남겼단다. 그런 난 자식이 셋 있는데 너희가 그중 누구 새낀지 말 안해도 알겠다. 특히 너! 얼굴은 애비를 빼닮았는데 왜 인간이지? 너 어머니가 인간인 게로구나? 어쨌든 첫째는 네 다리 켄타우로스인 에우클리드, 둘째는 네 다리 사티로스인 카리클레이아, 셋째는 여섯 다리 켄타우로스인 가이아나이다. 그들의 아버지는 모두 다르다. 할아버지가 없다고 실망하지 마라. 내가 그들보다 위대하니까. 하지만 그런 나에게도 약점이 하나 있는데 애들한테 해줄 이야기를 순서대로 하는 재주가 없다는 것이다. 대신 카리클레이아가 나의 이야기와 그에 얽힌 이야기를 글로 써 책을 만든단다. 지금부터 내가 읽어주겠다. 그 애가 십 년 전쯤에 나에게 주었단다. 당연히 다는 말고 일부만 읽어 보겠다. 자, 네가 한번 가져와 펼쳐 보렴. 읽기도 네가 하고. 

 

 


 

 

옛날 옛날 그리고 바로 어제까지도 세상에 ‘죽을 뻔’이라고 하는 거인이 살았다. 할머니, 그런데 왜 어제라고 해요? 옛날 일이잖아요? 그냥? 맨날 그냥이래… 알겠어요. 그 거인은 가이아의 피가 많이 희석된 이두나의 자식으로, 이두나는 황금의 시대로부터 마지막 영웅의 시대까지 자손의 자손으로 번성한 신들의 핏줄 중 가장 강력한 자들 중 하나라 일컬어질 만했다. ‘죽을 뻔’도 이름이야 우습다만 그의 어머니에게 뒤지지는 않았다. 죽을 뻔의 기구한 이력은 다른 모든 인간과 요정과 사티로스와 켄타우로스와 신과 거인과 마찬가지로 탄생에서부터 시작한다. 이에 대해 한 어머니를 위한 변호를 남긴다. 이두나는 자식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는 마지막 붉은 머리카락 한 가닥이 희게 세었을 때 꿈으로부터 비롯하여 아이를 배었음을 알았다. 첫 아이이자 마지막 아이였다. 이두나는 기쁨에 겨워 축복을 청하기 위해 자신에게 신세를 진 가정의 신 헤라를 찾아갔다. 헤라는 이두나에게 고마운 일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이두나의 아이가 장성하여 올림포스를 중심으로 한 정련되고 공고한 질서를 아주 조금이라도 흔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헤라는 머리와 꼬리 사이에 기나긴 사족이 붙도록 문장으로 축언하면서도 한 단어로 간단하게 매듭을 지을 수 있는 묘안을 내놓았다. 야, 나 물 좀 줘. 나 이거 읽잖아. 짜증나게 하지 마.

 

“너의 아이는 반드시 지어진 이름대로 살게 될 것이다.”

 

이두나가 원한다면 그 아이는 해와 달과의 달리기 경주에서도 지지 않고, 바닷속을 헤엄치는 모든 물고기를 제물로 받아도 견줄 수 없는 풍요 속에서 헤엄치며, 흉측하여 타르타로스로 던져진 친척만큼이나 못나더라도 숨 쉬는 모든 생명으로부터 사랑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모든 말에는 뒷면이 있다. 이두나는 쉽게 아기의 이름을 정하지 못했다. 축언으로 인해 이름 없는 아기는 운명조차 시작되지 못했으므로 이두나는 자라지 못하는 갓난아기와 함께 세계를 떠돌았다. 거인으로서는 작은 쪽배를 타고 영원히. 그는 승리가 패배의 친구이며 풍요가 결핍을 낳고 사랑이 질투의 양분이 됨을 보았다. 아기에게는 그 어떤 이름도 맞지 않아 보였다. 아기의 이름은 어처구니없이 지어졌다. 이두나가 단 한 번 아기를 떨어뜨렸을 때, 아기를 감싼 보자기가 이백 년 묵은 나뭇가지에 걸려 가까스로 살 수 있었다. 곧바로 아기를 주워든 이두나는 너무 급하고 놀라 “아, 내 아기, 죽을 뻔!” 이라고 외쳤다. 이거 진짜예요? 그러자 ‘죽을 뻔’은 여태까지 자라지 못한 만큼 단숨에 장성하여 자신의 운명을 깨달았다.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죽을 뻔’이 아니라 상어밥 니케포로스에 관한 이야기이니 이만 니케포로스에게 돌아가기로 하자. 니케포로스는 죽이고 싶어도 도무지 죽일 수 없는 거인 ‘죽을 뻔’과 근 8년째 분투하고 있었다. 여태껏 패퇴해본 적들에 비하면 어려운 상대는 아니다. 살아온 모든 날을 죽을 것만 같은 고통과 위기로 살아온 거인은 수많은 적과 친구를 떠나보내 더는 죽고 싶다고 울거나 쌓아둘 둥지도 없는 재산을 위해 욕심을 부리지도 않았다. 거대한 적의를 품는 일도 없었다. 니케포로스는 다만 그를 조금 비키게 하기 위해 싸웠다. 니케포로스를 처음 만났을 때 ‘죽을 뻔’은 괴물들의 바다, 괴물이 살 만큼 물이 깊지는 않은 군도 지대에 턱이며 팔꿈치를 괴어놓고 주저앉아 가끔 자고 가끔 깨며 수십 년째 살아오던 중이었다. 입술 바로 아래에서 물이 찰랑였고 폭풍이 칠 땐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린다. 식사는 잘 하지 않는다. 삶을 이어가기엔 충분했다. 그는 죽음의 위기를 벗어날 뿐 죽지 않았으니까. 대신 그는 이따금 영양 보충을 위해 괴물들을 잡아먹었다. 우웩! 더러워. 본래의 니케포로스라면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싶지 않겠지만 공교롭게도 문제가 있었다. ‘죽을 뻔’의 바로 턱밑에 스테넬로시아의 옛날 거처가 있으며 무언가를 남겼다고 밝혀져 반드시 니케포로스 자신이 그 섬에 올라야 했기 때문이다. 울며 호박 먹기로 ‘죽을 뻔’에게 다가간 니케포로스는 제딴에는 정중하게 머리를 비켜달라고 요구했다. 발도 아니고 머리를 비키라니 ‘죽을 뻔’은 조그만 여섯 다리 켄타우로스의 말을 들어주고 싶지 않았다. 그는 해묵은 산처럼 오래 살았고 그의 마음도 산과 같았다. 

 

니케포로스는 난색을 표했으나 함부로 그를 비키게 할 수 없었다. 다만 가끔 그곳을 찾아와 ‘죽을 뻔’이 자리를 비켰는지 말았는지 보러 갈 뿐이었다. 그럼 그 거인을 언제 죽였어요? 그가 거인에 대해 지닌 두려움에 관해서는 <니케포로스의 탄생>란에 기술하였다. 그런데 니케포로스는 어느 날 이상하게도 몇 명의 창칼을 든 인간이 ‘죽을 뻔’에게 다가가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는 거인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만 큰 소리로 이렇게 물었다. “겁을 상실한 자들아, 이쑤시개 갖고서 어디로 가느냐?” 그러자 창칼을 든 무리가 저들끼리 쑥덕거리다 대답하였다. 진짜 이렇게 말했어요? 이쑤시개 갖고서 어디로 가느냐!

 

 


 

 

“그들은 ‘열’이라는 자들이었단다.”

 

그러고서 그가 잠시 말을 끊고 포도주로 목을 축였다. 몸을 실컷 움직인 뒤라 그 모습을 보니 목이 말라온다. 아이들 중 가장 성급한 헤로이디온은 섣불리 구는 경향이 있었다. 신경 쓰지 않은 찰나 그가 아뜨거 하고 손을 물린다. 미처 끓은 차의 잔열이 식는 시간을 기다리지 않은 탓이었다. ‘다시는 그러지 말렴.’ 아드라스토스는 다정하지만 냉엄한 스승이었으므로 작은 소리로 타이르되 따로 그를 살펴주지는 않는다. 대신 이 속상한 친구를 돌보는 것은 어디 가서 아가씨 도련님 공주님 왕자님 소리 듣고 실제로 혈통이 그러한 귀한 꼬마들이다. 잠깐 입술을 달싹이며 미소지은 아드라스토스가 “열ιώτα이요?” 하는 한 박자 늦은 질문에 고개를 끄덕인다.

 

“니케포로스는 그 소개를 이상하게 여겼지. 왜냐면 그 사람들은 열 명이 아니었거든. 그가 열 명이 아니지 않냐며 따지려는 찰나 그들은 여섯 다리 켄타우로스 앞에서 겁을 먹지도 않고 제발 조용히 좀 하라며 되레 성을 냈단다.”

“정말요? 그러면 바로 ‘열’이라는 자들을 창으로 꿰어 죽였나요?”

“이제 보니 너희가 니케포로스를 좋아하는 까닭을 알겠구나.”

 

바로 니케포로스가 거침없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은 원래 모든 갈등이 주인공의 손에 즉각 초전박살나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어쨌든 니케포로스는 곧바로 그 싸가지없는 개자식을 죽여버리지는 않았다. 이것들이 기도 안 죽고 대거리하는 모습이 그렇게 나쁘게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아드라스토스는 어릴 적과 조금도 변하지 않은 여섯 다리 켄타우로스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기억나 잠깐 소리내어 웃었다. 자랑하는 중에도 별안간 쉽게 투덜거리고 높낮이가 강하게 널뛰는 목소리가. 어쩌다 보니 이렇게 감상에 젖다시피 했으나 어쨌든 하던 이야기는 마저 해주어야 한다. 검은 깃털을 빼앗기면 좋아하는 이야기를 하나 해 주기로 약속했으니까.

 

“알고 보니 열이라는 자들은 그의 생각보다 훨씬 겁이 없었지. 이들은 아나피 섬에서 열 가지 중죄를 짓고 괴물들의 바다로 쫓겨나 바위섬에 몰래 숨어 살던 무리였단다. 하지만 그들은 열 가지의 죄에 한 가지를 더해야 삶을 비로소 이어나갈 수 있었어. 어떤 생명도 살아갈 수 없는 섬을 나와 ‘죽을 뻔’의 살을 베어 돌아가는 것이었단다. ‘죽을 뻔’이 깨어나지 않도록 죽음의 독을 코로 빨아들이게 하고 그가 불완전한 죽음에 빠져들면 살을 가져가 그것으로 한 달을 살았지.”

“그건… 정말이지 나쁜 짓이에요.”

“끔찍해!”

 

아드라스토스는 욕설을 모르는 아이들이 표현할 수 있는 최대한의 불만이 끝날 때까지 지저귐에 귀를 기울이다가 간단한 질문으로 이 아기새들의 입을 다물게 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니? 이들이 수레바퀴로 적군을 즈려밟은 장군보다 나쁘고, 발굽으로 가슴을 부수어 죽이는 니케포로스보다 나쁜 이유가 무엇이지? 어쨌든 누구도 죽지 않았으니 말이야. 오히려 살렸지.”

 

툭! 텅 빈 파도무늬 원뿔 잔에 언제 가져갔는지 모를 깃털이 떨어진다. 뱀의 비늘처럼 소리 없이 일어난 아드라스토스가 산뜻하게 걸음을 돌렸다. 아이들은 질문으로 끝나버린 이야기에 안타까워할 시간도 없이 스승의 기막힌 솜씨에 놀라워하다 모래를 서로 털어주며 안으로 들어간다. 평소라면 바깥에서 더 머물렀겠지만 비가 오려는지 구름이 낮게 내려온다. 그러므로 아직 한 방울도 젖지 않은 아이들이 수선을 부리며 헤어지기도 바람같이 빨랐다.

 

 


 

 

“난 그 대답이 이상하게 불쾌했어.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지. 하지만 난 생명은 물론 옳고 그름에 관하여 그 누구도 함부로 계도할만한 자격이 없어. 지금도 그렇잖아. 네가 곁에 있었더라면 말을 골라내기가 쉬웠을지도 몰라. 네가 알아서 알려줬을 테니까. 어쨌든 난 그 대답을 인정할 수밖에.”

 

그러자 아이스킬로스는 답을 전연 뜸들이지 않았다. 

 

“신과 영웅의 시대에 발을 디디고 살던 때였다면 신을 만족하게 한 자가 영웅이 되는 법이라 했을테지요. 제 원한은 충분히 많은 이들을 제때 죽이지 못한 것에 있었으니 지금이라 하여 답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는 현자가 아니니까요.”

“누가 널더러 현자를 하래? 들을수록 헷갈리는데, 혹시 나를 현혹시키려는 수작인가? 받아라!”

 

니케포로스가 인력이 당기지 않고 위아래 없이 오로지 흐르기만 하는 강물 코퀴토스에 맨 앞발굽을 담갔다가 빼었다가 하다가 갑자기 물을 아이스킬로스에게 확 튀겼다. 한창 그런 장난이 재미있을 나이, 정확히는 알 수 없다. 황천에서 헤아리는 나이에 의미 있으랴. 아이스킬로스는 어디 가서 지지 않는 자로 이마가 화드득 젖자마자 곧장 복수 활극이 시작된다. “잠깐, 잠깐만, 나 말하고 있었잖아.” “변명인가요?” 두 개의 맑은 그림자가 물결 위에서 마음껏 이지러진다. 코퀴토스의 물그림자에서 비롯되어 가슴을 찌를 시름이라는 칼은 무뎌진 지가 오래. 생전에 진작 뱉었어야 할 탄식도 모조리 숨을 잃었다. 맨 처음 저승에 당도했을 때. 그리고 충분히 거닐고 나서. 불꽃은 저 옆동네에 있고 물방울 튀는 신경전으로 얼마간이나 씨름했을까. 놀 거리가 별로 없어 무엇이든 쉽사리 질리지 않는 마음에 물장구가 자리를 잃는다. 그런 뒤에야 물을 벗어나 아무 곳으로 가 앉기로 한다. ‘아무 곳’ 정말 그 어디든 상관 없다. 얼마나 걸리든 시간은 순서에 불과하지. 입에 빵을 처넣나 돌을 처넣나 두 번 죽겠는가, 아니면 세 번 죽겠는가. 여덟 개의 발과 네 개의 눈은 어디로든 향할 수 있다. 자, 마저 발길 닿는 대로 걷자. 강가의 자갈이 그러하듯이 이야기의 하부에도 발아래 주석이 늘어간다.

 

“그래서 나는 일단 돌아가기로 결정했어.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거든. 남들이 나보고 저것들 뭐 하는 자들이냐며 캐물었지만 그냥… 난 그냥 말하고 싶지 않았어. 난 그들보다는 나 자신과의 대화가 필요했거든. 상당히 간만에. 난 나에게 의문을 제기하는 법이 통 없잖아. 그래, 그것이 다였어. 어쨌든 그것들은 내가 아니어도 금방 답을 찾았어. 에우테르페 호는 충분히 빠르지만 쏜살같지는 않으니까. 궁금한 사람들은 맹독을 무슨 어린애 콧물처럼 들이마시고 죽음에 가깝게 곯아떨어져서는 코를 베어가도 모르게 살이 숭덩숭덩 잘려나가는 ‘죽을 뻔’을 원없이 볼 시간이 있었어. 상처에서 피가 울컥 솟구쳤지만 ‘열’이라는 자들이 떠나면서 깨끗하게 아물었지. 이런 말 하긴 뭣하지만 실로 장관이었어... 내가 ‘죽을 뻔’을 다시 만난 건 달이 수 번 차올랐다가 도로 기운 뒤야.”

 

말하다 말고 한번 니케포로스가 침을 삼켰지만 그것은 아직 생전의 버릇이 모조리 사라지지는 못한 것이지 필요해서 하는 일은 아니다. 곧바로 이어진다.

 

“그런데 간만에 눈을 뜨고 있더라고.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사실 그때 보자마자  물어봤었는데, 기억이 안 나. 하여튼 그 점에 대해서는 양해를 구하지. 난 몇 마디 하다가 ‘죽을 뻔’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봤어. ‘그대는 인간들이 찾아와 그대를 죽음에 빠뜨리고 살을 베어가 먹는 사실을 아시오?’ 그러자 ‘죽을 뻔’이 작게 투덜거렸어. ‘난 네가 더 귀찮다. 가라, 작은 켄타우로스야.’ 내가 미처 대꾸조차 하지 못한 채였어. 그가 주먹을 쥐고 물을 크게 내리치자 바닷물이 크게 튀더니 돛을 온통 적셨어. 뭐 그런 다음에야 우린 도망갈 수밖에. 하지만 난 종종 그를 찾아갔어. 그런 그가 왜 하필이면 스테넬로시아의 거처 위에 턱을 괴고 있는가가 궁금했거든. 하지만 내가 한마디 하면 그가 대답하면서 꺼지라고 또 물을 내리쳤고, 우린 혹시 그가 변덕이 생겨서 에우테르페를 통째로 마시고 싶어할까봐 물을 맞고 나면 바로 줄행랑을 놓았지. 대화의 내용은 그냥 뭐, 그러고 있는 게 좋냐? 심심하냐? 아직도 먹히고 있냐? 뭐 그런 거였어.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 난 스테넬로시아가 영생이며 불멸이며 하여간 그에게 주어지지 않은 어떤 신성에 미쳐있었다는 걸 충분히 알긴 했는데 ‘죽을 뻔’에게도 손을 뻗었다는 사실을 알아내었지. 그는 내가 스테넬로시아의 딸이라는 말을 전해 듣고 놀라워했어. 그리고 그제서야 제대로 일어나 앉아선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지. 아마 무척 작게 보였을 거야. 아기새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구경하기와 마찬가지로.”

 

문득 돌벽이 가깝다. 그는 생전에 종종 그러했듯이 가벼운 걸음으로 뛰어올라 니케포로스를 내려다보았다. 성벽 잔해를 부리로 쪼개 금속구를 뜯어가려는 까마귀처럼. 제법 굶주린 눈빛을 흉내내며 웅크렸지만, 이 곳을 언제나 떠도는 희푸른 빛이 드러내보이는 것은 공상에 빠진 청년일 뿐이었다. 니케포로스는 충분히 작아 보이는가? 눈을 마주치려고 목이 꺾어져라 시선을 올리던 니케포로스가 눈을 찌푸린다. 주먹도 옹골차게 쥐고. 목에는 핏대를 세워서!

 

“그는 나에게 이렇게 윽박을 질렀어. ‘스테넬로시아에게 영생이 주어지면 나에게는 필멸이 주어져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거래였다.’ 아, 정확히 그랬다는 말은 아닌데 목소리가 그만큼 컸다는 거야. 난 그 이후로 남들에게 함부로 소리지르지 않아. 귀가 정말 아프더라고. 젠장, 둘 말고 누가 그 말을 직접 들은 것도 아니고, 내가 그 거래를 대신 이행해줘야 할 건 뭐야? 난 굳이 따지면 여기서 지불 수단에 가깝지 않아? 날 영생이라고 불렀잖아!”

“과거에 해결되지 않은 짐을 자손들이 해결하는 것이라면 낯설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담기는 것은 웃음으로도 슬픔으로도 간단히 이름지을 수 없었다. 쩌렁한 읍소가 퍼져나가다 아이스킬로스에게 부딪혀서 바스라진다. 일순 할 말도 머릿속도 막막해진 니케포로스가 높이 뻗은 손을 그에게 기울였고 아이스킬로스는 응하지 않아 한쪽은 좁고 가는 돌벽 위로 한 쪽은 황량한 돌길로 나란히 걸어갔다. 머리부터 거꾸로 떨어져도 조금도 다치지 않을 이 유령에게 두 번씩이나 손 내밀 것은 없다. 니케포로스의 귓가로 일부러 내는 발소리가 드문드문 옷자락처럼 스친다. 

 

“어쨌든.”

 

 


 

 

뒷걸음질 한 번이면 두 사람 발을 한꺼번에 밟을 만큼 북적거리는 인파와 시대를 불문하는 인산인해로 가득 찬 시장바닥 한가운데, 나무 잘라다가 널어놓은 좌판대 하나로 온갖 종류의 인간들이 모여든다. 한 중키의 사티로스가 바닥을 힘차게 뛰어다니며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고 있었다. 구경꾼 중에서는 아이도 있지만 어른이 훨씬 많았고 서로 어깨에 무릎에 치이면서도 그 난리통에서 이야기꾼의 목소리를 잘 들어보기 위해 가깝게 붙어앉아 그의 말 한 마디 두 마디에 야유에 정신이 팔린다. 이 사티로스가 니케포로스의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를 한대서 벌어진 판이다. 영 근거 없다 치부하려니 그의 이름은 힐라리온으로 그에게도 많은 낭설이나 칭송이 뒤따랐지만 하고많은 별칭에는 ‘니케포로스의 친구’도 따라다녔다. 니케포로스도 마찬가지고. 그러니까 생전에 그랬다는 말이다.

 

“그래서 말이지! 니케포로스는 억울하게 입술을 꽉 다물었어. 걔는 생각보다 겁이 많거든. 아, 그거 알아? 내가 걜 처음 봤을 때, 니케포로스는 자기가 쉰 살이라고 그랬다? 얕보이기 싫어서 말야. 어려 보이기 싫어서도 그렇고. 하지만 나 힐라리온은 니케포로스의 연령을 금세 꿰뚫어보았어. 덩치는 분명 컸지만 얼굴에선 어쩔 수 없는 앳됨이 똑똑똑 떨어지고 있었으니까. 아차차, 하던 이야기로 돌아가야 하지. 니케포로스는 졸지에 죽지 않는 거인을 죽여야 하는 신세가 되었어. 물론 그것 때문에 더 유명해졌지만. 세상 사람들은 니케포로스가 ‘죽을 뻔’과 무슨 대단한 혈투를 벌여서 목숨을 취한 것으로 알지만 나! 바로 나를 비롯해 겨우 몇 사람만이 이 진실을 알아.”

 

발언권을 따로 얻는 자리는 아니다. 질문이 휙 날아온다.

 

“그런데 이렇게 다 생선뼈 발라내듯 낱낱이 떠들어도 되는 거요?”

“이걸 말해도 되는 거냐고? 그을쎄… 하! 하! 하!”

 

어색한 웃음이다. 좌우간 이야기를 그만하라고 늘어지려는 셈은 아니었으니 청자는 콧김을 훅 내며 입을 다문다.

 

“니케포로스는 아폴론 신전에나 어디든 이 기막힌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선 조언이 필요하다며 가려고 했지만 ‘죽을 뻔’은 거짓말 아니냐며 짜증을 냈어. 그야 스테넬로시아는 평생 ‘죽을 뻔’을 다시 찾아가지 않았으니까. 이쯤에서 니케포로스가 대단한 조언과 계시를 찾아 여행을 떠나야 할 것 같지.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다면 니케포로스를 잘못 안 거야. 거인을 당장에 죽여 소원을 성취해 주거나, 평생 여기 잡혀있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하라니 니케포로스가 무슨 생각을 했겠어. 니케포로스는 스테넬로시아를 죽인 이지창을 두손으로 잡았어. 그리고 고개를 쳐들었지. 보통 사람이라면 지져버릴 듯 눈알로 쏘아내려갈 햇빛은 그 노란 눈에는 미지근하게 느껴진다고 해. 오래는 아니지만. 곧 니케포로스는 거인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어. ‘이것은 아폴론의 살과 숨으로 빚은 스테넬로시아를 죽인 무기요. 그러니 뭐, 몰라, 어떻게 잘 되겠지. 안 되어도 아파하진 마시오. 나도 하고 싶어서 이러는 거 아냐.’ 니케포로스는 여러모로 상식을 벗어나는 자야. 그를 가리키는 칭호와 이름은 수도 없이 많지만 그를 제대로 드러내진 못하지. 거인은 생각하거나 대답할 새가 없었어. 놀라 눈을 감았다더라. 죽음을 아무리 바란다 해도 자신이 원하는 끝은 있었겠지. 좀, 고상하게? 하지만 니케포로스를 막을 생각은 들지 않았나봐. 창을 던지자 두 개의 날이 두꺼운 가슴팍을 두 쪽으로 갈랐지. 그러나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어. 심장을 뚫기 위해 미끄러지는 창대를 잡자 생명력을 결코 잃지 않는 뜨거운 붉은색이 니케포로스의 손과 팔과 어깨를 타고 얼굴까지 온통 적시기 시작했어. 그는 어쨌거나 움직였지. 한 마리의 불새처럼! 깊은 손금과 커다란 발굽, 검은 속눈썹과 하얀 이빨에까지 피가 끼었어. 곧 두 손이 혈액을 강력하게 뿜고 빨아들이는 심장에 닿았지. 손가락을 잔뜩 우그리며 쥔 창이 부들부들 떨렸어. 피부를 온통 적시고서도 눈알 뒤쪽까지 들이치는 피가 거센 폭포의 유속처럼 온몸을 뒤흔들었다고 해. 우리가 마주쳤던 세상의 끝에서 만난 그 거대한 물의 벽에 맨몸으로 부딪혔다면 꼭 그랬을까? 그는 이내 안쪽으로 들어갔어. 더, 더, 조금만 더. 그리고 마침내 이지창이 심장 하나를 완전히 갈라놓았을 때, ‘죽을 뻔’이 뒤로 고꾸라졌어. 그는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내용같이 대단한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어. 또한 니케포로스와 열흘 밤낮을 싸웠다는 말도 거짓말이야. 그 일은 한순간에 벌어졌다는 것이지. 난, 그 사실이 별로 놀랍지 않아. 니케포로스를 아니까.”

 

힐라리온은 그렇게 말하며 한 발을 쭉 앞으로 뻗으며 나섰다. 그 어떤 얼굴도 없는 쪽인데 자연스럽게 사선으로 올려다보게 된다. 어릴 적에나 나이를 먹어서나 희게 빛나는 머리카락이 있을 자리에 대신 천구를 달리는 태양 전차가 밝게 빛난다. 그는 니케포로스의 거창하지는 못한 말솜씨와 군더더기 없는 태도가 조금 그리워졌다. 두 사람은 키가 맞지 않아 그는 힐라리온을 부르고 주의를 돌리려 손이나 팔뚝을 잡기보다 힐라리온의 목과 어깨에 손바닥을 살며시 대었다. 그의 살성은 소금 바람에 거칠고 두꺼웠지만 둥글고 뭉뚝한 손톱에 힐라리온을 다루는 완력이 약해서 작정하지 않는 한 상처를 남기는 법이 없었다. 상처를 낸 적이 있다는 말은 아니다. 고의가 아닌 선에서 그렇다는 소리다. 혼자 웃다 말고 이야기를 마무리하기 위해 헛기침을 하다 한 자리에서 두 바퀴 반을 돌며 훌쩍 뛴다. 아쉽게도 이 자리엔 “또 해봐!” 하며 추궁하듯이 쫓아올 니케포로스가 없다. 

 

“그런데 있지, 거인을 죽이고 찾아간 스테넬로시아의 거처에는 그냥 누가 살던 흔적만 있을 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어. 스테넬로시아는 니케포로스를 부른 게 아니었어. 니케포로스를 ‘죽을 뻔’에게 보낸 것이었지. 마치 보내기로 약속한 물건처럼 말야. 하하하!”

 

그는 이 말을 덧붙이려다 꾹 참았다. 니케포로스는 억울해했지만 난 별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니케포로스가 바다로 던질까봐 정말 속상했겠다며 위로해주긴 하였다. 아무리 철이 들어도 수틀리면 사람 하나 덜렁 들어 바다로 던지기 참으로 쉬운 켄타우로스니 말이다. 그는 그때 흰털이 삐죽빼죽 나기 시작한 검은 등을 두드리며 덧붙였다. 덕분에 너에게 멋진 영웅담이 하나 더 생겼잖아! 기분 풀어주기 참 쉬운 상대여서 그것만으로도 불평이 가시고 만다. 하여간 단순하긴. 그래도 니케포로스는 좋은 친구였다. 유명한 영웅이 좋은 영웅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어도. 

 

“하지만 이것만큼은 사실이야. 니케포로스는 그 이후로 거인을 두려워하지 않았어. 평생.”

 

영원히 사는 거인을 죽인 영생약 니케포로스, 그는 비록 삶을 완결했지만 남기고 간 이야기는 여전히 끝내주지. 그거면 좋은 켄타우로스 정도는 할 수 있잖아. 안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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