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글0/니케포로스

새와 늑대의 시간

by 곽제가 2021. 7. 26.

니케포로스&아이스킬로스

 


 

애초에 나기를 인간으로 태어난 그것은 성문법과 관습으로 쌓은 인간의 무리에 쉽게 적응했다. 길을 따라 걸으며 벽을 뛰어넘지 않고 누구를 함부로 놀라게 하지 않고 아이에게 입질하지 않고 다만 행실 나쁘게 구는 사냥꾼과 군사들에게는 손속에 자비를 두지 않았다. 이것이 낮의 늑대에게도 사람이 남아 있음을 증거했다. 인간에게 꽤 우호적이라 이름을 붙여줄 만도 하나 늑대에게는 따로 이름이 없었다. 세계 만방 어디를 가나 인간의 무리는 서로와 서로의 재산과 자신의 재산을 구분하기 쉬우라고 이름을 꼭 붙여 부르지만 사람과 지내는 늑대는 단 하나였기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늑대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심드렁하니 아는 체하는 법이 없었다. 영물이라 사람 같은 이름을 원하나 싶어 별별 성인과 공주와 여왕의 이름을 다 붙여 보아도 마찬가지였다. 아마 낮의 늑대에게 사람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겠지. 늑대는 한 가지의 이름에만 대답했다. 그것을 불러주는 이도 한 사람이었다. 그는 늑대와 함께 나타난 청년으로 밤에는 새가 되어 날아오르는 마법사라는 허언이 돌았다. 그와 늑대는 언뜻 데면데면하면서도 마주치면 서로를 많이 반가워하며 좋은 티를 냈다. 보통 늑대는 영주와 함께 있었는데 영주가 “이만 늑대를 데려가라.” 하면 그는 “알겠습니다.” 하고 늑대는 그의 짧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가가 괜한 박치기를 하는 것으로 나가자 나가자 실컷 의사 표현을 했다. (영지민들이 보기에 늑대는 영주를 사랑하는지 자주 그의 곁으로 돌아가는데 영주는 그만큼 늑대를 좋아하지는 않아 보였다. 저녁에나 기어나와 병사들과 어울리거나 공무를 보는 영주 대리이자 후계는 늑대라면 아주 학을 뗐다. 그렇게 두 모녀에 대한 괴소문은 금방 잦아들었다. 대부분 마녀라는 오명이었다. 그래서 청년에게 말꼬리가 붙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청년은 늑대와 사냥을 가거나 방에 틀어박혀 문 바깥을 넘어가는 법이 없는 낮은 목소리로 끊임없는 말을 걸었다. 

 

“니케포로스. 천천히 가세요.”

 

나뭇잎이 잘그락거리며 부서진다. 두 발 달린 것 하나, 네 발 달린 것 하나. 그래서 발이 도합 여섯 개. 아무래도 오늘은 사냥을 가는 날인 듯하다. 요새는 사냥을 자주 나갔다. 그도 그럴 것이 여우가 닭을 물어가는 가을이다. 멧돼지도 종종 사람을 해친다. 먹을 것이 모자라 늑대가 어린아이를 물어가기도 했다. (곰이 나타나면 즉시 보병과 궁수를 꾸려 토벌하기에 늑대는 이 근방에서 가장 두려운 맹수였다. 다행히 사람들은 노란 눈의 늑대와 비쩍 골은 산중의 늑대를 잘 구별했다.) 니케포로스가 투견처럼 앞서가다 말고 멈추어 섰다가 금방 그의 곁으로 돌아왔다. “오셨나요?” 곧 둘은 걸음을 맞추게 된다. 그는 늑대를 따라갈 때 주변을. 특히 발밑을 조심히 살폈다. 먼젓번에 이빨로 옷을 당겨가며 재촉하기에 일났다 싶어 급하게 따라갔더니 먼지버섯을 밟아 낭패를 보지 않았겠는가? 버섯을 노려보고 있으려니 이미 늑대는 멀리 달려나간 지가 오래였다. 이것이 또한 낮의 늑대에게 사람이 남아 있음을 증거했다. (이외 다양한 방식으로 사람 골리기를 즐겨했다. 사람이 알아서 피해야지.) 늑대의 목덜미를 쓸어내린다. 깊은 골짜기에 접어들었다. 산을 오른다면 산짐승을 조심해야 했지만 니케포로스는 밤의 사람일 때에도 다른 이보다 키가 훌쩍 컸다. 장정이라 일컬어지는 아이스킬로스도 그를 조금은 올려다보아야 했다. 낮의 늑대도 일어서면 낮의 사람과 높이를 견줄 수 있다. 둘은 하나이므로 잴 수 없다는 것이 아쉬운 일이다. 타고나기가 그럴진대 항상 사람도 못 먹는 고기를 마음껏 먹고 힘이 뛰어났기에 어지간히 무거운 초식 동물과 힘 싸움을 해도 지는 법이 없다.  또 마을 근처의 짐승들은 어미가 가르치고 생애로 익힌 인간들의 무기를 잘 알았으므로 둘의 근처를 맴도는 간 큰 짐승들은 별로 없었다.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이 땅을 지나는 누구든 영주가 끼고도는 늑대 목숨을 취해 명예롭고 싶지는 않으리라. 

 

그때 늑대가 고개를 들었다. 무엇을 사냥하자고 정하고 가지는 않았고 유희일 따름이어서 무엇이든 잡힌다면 좋은 일이다. 니케포로스가 바람의 반대 방향으로 움직인다. 그는 니케포로스의 움직임을 손쉽게 알아차리고 몸을 반쯤 웅크려 쫓아갔다. 커다란 나무와 낙엽과 바싹 마른 덤불로 가려진 낮은 둔덕을 지나자 시냇가에 중멧돼지 한 마리가 물을 마시고 있었다. 무늬와 크기를 보아 일년생이 채 되지 않은 듯싶었다. 요컨대 거의 성체에 준할 만큼 자라 고기가 많지만 경험이 없으므로 훨씬 어리바리한데다가 완전히 독립하여 무리에 예속되지 않았으므로 힘들이지 않고 잡을 수 있다는 뜻이다. 니케포로스가 아이스킬로스를 잠깐 올려다보고 그 자리를 피했다. 

 

그에게는 다른 할 일이 있다. 힘주어 활에 시위를 매긴다. 곧게 뻗은 개암나무를 베어다 통짜로 켜서 만든 그의 활은 첫째로 아직 손에 많이 익지 않고 둘째로 고향에서 쓰던 것만은 못했지만 제식 활보다는 유효거리와 장력이 우월했다. 아이스킬로스는 멧돼지를 많이 잡아 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어떻게 죽이는지는 충분히 알았다. 모가지의 가죽이 특히 두꺼우므로 목을 노릴 순 없다. 단번에 심장을. 그리고 눈알을. 웬만한 골통은 단번에 깨부술 만한 힘으로 돌진하면서도 그 덩치와 인상에 마땅하지 않은 민첩성을 지녀 까다로운 짐승이다. 다행히 그는 훌륭한 궁수이다. 언제나 충분히 인내했고, 누구든 화살을 걸어 놓으면 힘이 닳아 조급증이 일기 십상이지만 그것을 견딜 만큼의 힘도 대단하다. 자고로 멋진 궁수의 완성은 정확성이다. 화살이 오른눈을 꿰뚫자 멧돼지가 몸을 뒤틀더니 분노에 차올라 그쪽으로 뛰어온다. 멋진 궁수의 기상은 신속함에서 드러난다. 화살이 심장을 관통한다. 

 

멧돼지가 쓰러지자 아래에 도사리고 있던 니케포로스가 어슬렁어슬렁 나타났다. 여느 사냥개가 그렇듯 늑대가 이빨과 발톱으로 뱃가죽을 뜯어 놓으면 별 대수롭지도 않은 사냥이 될 것이 불 보듯 뻔했으나 그는 피로 젖은 시체를 산 아래로 끌고 가고픈 마음은 조금도 없었을뿐더러 그와 똑같이 붉은 피가 흐르는 생명을 고통 속에서 지난하게 버티도록 하고프지도 않았다. 연민이다. 니케포로스도 그의 방식에 익숙해졌다. 이를테면 사냥개보다는 호위에 가까운 셈이다. 개가 아니니 고기를 앞에 두고 달라고 보채는 일 없고 피를 보았다고 흥분하는 법은 더더욱 없다. 점잖게 멧돼지를 어깨에 이는 그를 따라갈 뿐이다. 조금은 앞서고 가끔은 주변을 돌아보면서. 지금 하산하지 않으면 시체 하나 있다며 광고하는 꼴이 된다. 분명 해가 지기 전에는 돌아가겠지만 일기를 쓸 겨를이 있는가가 걱정이다. 얼른 돌아가야 한다. 일기를 교환하는 시간. 저녁에나 기어나오는 공녀가 눈을 뜨리라. 날개가 하얗고 부리는 노란 새가 날아오르는 시간. 그것은 올빼미이다. 늑대가 밤의 새와 자리를 바꾸는 시간. 저주의 결과이지. 그러니까 이를테면 새와 늑대의 시간이 오기 전까지.

 

 

 

'글0 > 니케포로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살 만큼 살다가 죽었더니 10살 생일날로 돌아와 있었다  (0) 2021.08.05
끝내주는 이야기  (0) 2021.07.26
N-6  (0) 2021.07.26
N-5  (0) 2021.07.26
N-4  (0) 2021.07.26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