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케포로스&아이스킬로스 X-men AU
잠에서 깨어나려 한다. 온몸이 수문처럼 열리며 세상을 받아들인다. 어렴풋한 윤곽이 운용 가능한 지각 범위 안에서 돋아나고 창틀을 타고 바람이 넘어와 수천 개의 가지며 손가락이 되어 그 안을 마음대로 훑어대었다. 살아 있는 사람의 박동, 엷은 숨소리와 곁방에서 두런거리는 말씨까지 모두 그릴 수 있는 패턴이 되어 귓가에 묻어나고 나서야 빛이 찾아든다. 이 모든 과정은 니케포로스의 꿈속에서 온몸이 3차원을 넘어서는 고등한 큐브로 무너지고 도로 재구축하는 기묘한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스스로는 그것이 기묘한지 어쩐지도 평생 모르겠으나. 눈앞이 영멸할 것처럼 까맣게 물들었다가 밝아진다. 찡그리며 눈을 떴고 현실로 돌아오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몇 번 더 뒤척거리다가 몸을 뒤집는다. 손빗으로 빗으나 마나 한 긴 머리채를 더듬었고 눈곱을 떼어 조금 생각하다가 일어나기가 싫어 옷에다 대충 문댔다. 도로 머리맡에 관자놀이를 박으면 보이는 얼굴이 있다. 콧잔등이 부드럽다. 각이 덜 진 뼈. 아침인데도 솜털 하나 없이 미끄러운 턱. 빼놓을 것 하나 없이 낯설다. 여자아이의 얼굴로 눈을 떠서 말하는 법이 없었으므로 당연했다. 손이 슬그머니 기어 올라가 손톱 밑의 부드러운 끝으로 눈꺼풀 아래를 가만히 쓸어본다. 목이 움츠러든다. 많이 거슬리나? 이윽고 얼굴을 돌린다고 깨는 법 없다. ‘너는 누굴까?’ 눈동자의 빛깔, 크기가 어떤지나 목소리가 구관조처럼 굵은지 꾀꼬리처럼 높은지도 모른다. 저번에 눈꺼풀을 열어서 눈동자가 무슨 색인지 알아보려고 했는데 실패했다. 그렇게나 빠르게 돌아오는 것은 난생처음 봤다. 하지만 놀랄 거리는 아니다. 눈은 여리고 예민하니까. 완전히 돌아오기 전에 손을 내리고 모르는 척 가만 쳐다보고 있었더니 그는 니케포로스가 뭘 했는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아는 척은 않았다. 그가 언질한 적 없고, 여태 문제 생긴 적도 없고, 무엇보다도 몰래 침대 위에서 과자 까먹기 좋았으니까. 그의 귀가 얼마나 좋든 잠에서 깨어나는 몇 초로 완전범죄를 꾸미기에는 충분했다. 숨기고 말고 할 것도 없다. 그가 눈을 뜰 때 웃고 있으면 그는 순진하게시리 마주 웃어주었다. 순진하다는 말에 의문을 표할지도 모르겠지만 니케포로스는 아이스킬로스가 바보 같고 순진하다고 생각했다. 사막에 머리를 파묻은 타조 같은 꼴인 줄도 모르고. 그것 말고도 니케포로스는 그의 얼굴을 찰흙 빚듯 만져보는 것도 좋아했다. 그러고 있으면 어느 순간 어딘가가 패이고 융기하며 순식간에 니케포로스가 아는-익숙한-가장 좋아하는-외 기타 수식어가 붙는 아이스킬로스의 얼굴로 돌아왔는데, 그는 자기가 자는 척에 소질이 전혀 없다는 것을 몰라서 그 상태로 한참이고 가만히 있을 때도 있었다.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다 고개도 들지 않고 그를 불러 본다. 코와 흉통이 눌려 변질한 코맹맹이 소리가 베개에 잡아먹혀 많이 작다.
“아이스킬로스.”
그래서 한 번에 일어나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머리카락을 당기거나 코나 광대와 입가 중 어디를 아무렇게나 눌러보는 수도 있었지만 어쩌다 보니 어정쩡하게 얼굴 위에 뜬 손을 홰홰 젓다가 손등을 가만히 볼에 대어보았다. 따뜻하게 달아오른 수면의 잔열이 점차 식어간다. 느낀다기보다는 알았다. (그 밖에도 아이스킬로스가 깨어난다는 걸 눈치챌 여지가 한 네 가지 정도 더 있었다. 손가락이 지나갈 때마다 간지러움을 참으려고 얼굴이 슬며시 굳는 것, 보이지 않는 반대편 손가락을 오므리는 것, 눈을 더 세게 감는 것, 뭐 그런 것들. 니케포로스가 아니면 잘 모르는 것들. 니케포로스에게 허락된 것들.) 손을 거둔다. 둘은 키가 비슷해서 가까이 굴러가면 어김없이 발이 달칵 부딪힌다. 가벼운 마찰. 뼈가 뼈를 문지르며 울리는 고동. 피부에 그물처럼 그어진 주름이 느껴진다. 니케포로스의 발은 날밤을 새도록 이불 바깥에 튀어나와 있었기에 조금 차갑다. 그새 해가 올라온다. 눈꺼풀을 열려는 빛에 힘입어 나머지 한 사람이 천천히 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한다. 의태 하는 문어의 살처럼 온몸이 새롭게 정돈하는 과정이 두어 번 반복되었다. 깨려다가, 말다가. 그래서 채근하듯 또 한 번.
“아이스킬로스. 일어나.”
그제서야 니케포로스가 찾는 사람이 눈을 뜬다. 기분이 왜 좋은지는 통 모르겠지만 그가 깨자마자 조용히 웃었다. 그래서 니케포로스도 웃었다. 웃음은 전염하기 너무 쉽다. 재채기와 감기, 하품과 게으름처럼. 안 그래도 나뭇잎 굴러가는 모습만 봐도 박장대소하는 나이라 그런지 뒹굴며 한참을 웃기에는 충분하다. “다 웃었어?” 그 물음에 입술을 일자로 닫았지만 그렇게 물어보면 헷갈린다. “몰라.” “그럴 줄 알았지.” 그가 발부터 침대 밖으로 뻗으며 일어난다. 어디 가냐고 묻는 말도 없이 자는 동안 제자리에서 빠져나온 주머니 안감을 쭉 잡아당겼다. 공정상의 문제가 있었는지 꼭 자고 일어나면 한 쪽만 대탈출을 감행했는데 이미 몇 번 잡아당겨서 구멍이 나기 한- 3보 전쯤이다. 소금 한 꼬집 같은 폼으로 힘은 또 세서 가는 길을 제대로 막는 재주가 있다. 하는 수 없이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는다.
“아!”
“어디 가?”
어디 가는지 알면서.
“물 마시러.”
“그럼 내 물도 갖다줘.”
이렇게 시켜먹으려고. 곧 코앞까지 물을 대령해와 홀짝홀짝 마신다. 다 마신 컵을 침대에 내려놓으면 직선거리 1m를 주파하여 얌전히 탁상으로 제자리를 찾는다. 스스로 하지 않아도 일이 해결된다는 점에서는 마법 같다. 지나간 뉴스를 볼 시간이다. 아이스킬로스가 아무리 다재다능하다지만 두 배는 무거운 사람을 짊어지는 완력과 인정머리까지 겸비하지는 않았기에 알아서 움직이는 수밖에 없다. 슬리퍼 한 짝을 찾지 못해서 깽깽이로 거실을 가로지르고 나면 얼마 가지 않아 소파가 있다. 그의 몇 안 되는 장점 중 하나는 리모컨을 끝내주게 잘 찾는다는 것인데, 역시 보지도 않고 리모컨을 찾아 채널을 돌린다. 누웠다 일어난 지 얼마나 된다고 그새 소파에 늘러붙은 궁둥이를 옆으로 옮겨서 아이스킬로스가 앉을 자리를 만든다. 팔을 뻗으면 그의 어깨가 모조리 들어온다. 성대에서 긁는 소리를 내는 안 좋은 쪼가 있는 앵커가 새로운 소식을 전해주었다. 사건과 사고, 온갖 끔찍한 데이터와 정치적 음해, 날씨, 경제, 의로운 사람들에까지 주제가 한참이나 지나가다 보면 두 사람은 이렇게 기대었다가 저렇게 기대었다가 눕거나 일어나면 다른 한 사람이 눕거나 아니면 서로 반대편에 누워서 모자라는 자리는 다리를 겹쳐서 해결했다. 생각나는 말을 하고 대답하기 힘든 질문도 했다. 그 어디에도 갈 필요 없는 조용한 하루가 지나간다. 도망 생활 중이라 드문 일이다. 지금을 실컷 즐겨야 한다. 문득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아이스킬로스는 이미 앉아 있었다. 뱃심으로 벌떡 일어났더니 그의 얼굴이 바로 보인다. 아이스킬로스가 눈을 감으면 습관적으로 벽이나 어디로든 손이 올라간다. 그다음 벌어질 일을 아니까. 입가에 가까운 자리에 입술이 닿았다. 꼭 얼굴을 떼어내면서 눈을 뜨는 버릇이 있길래 니케포로스는 눈을 잘 감지 않았다. 완전히 떨어지기 전에 아이스킬로스의 목을 짚었다. 아주 가끔 필요 이상으로 아귀 힘이 약할 때가 있다. 다름 아닌 원하는 것이 있을 때. 두 사람이 완전히 멈춘다. 정적. 서로의 숨을 빼앗았다가도 돌려보내는 더운 공기가 빼곡하다. 물보라처럼 밀려오는 간지러운 경련. 완만한 각도로 비쳐오는 햇빛이 그의 머리로 가려 월식같이 어둡다. TV가 내놓는 전자음 사이의 빈 공간을 메우고 어둠을 내모는 기나긴 눈맞춤이었다. 니케포로스는 아침을 베어내 그릇에 담고 싶었다. 가끔 들여다보면 자기 얼굴이 비칠 수 있을 정도로 넓은 그릇에. 시간이 지나도 기억처럼 이리저리 물크러지지 않게. 고정될 수 없는 상대를 사랑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대신 니케포로스는 그가 지닌 수백 쌍의 눈동자에서 변하지 않는 것을 딱 하나, 잘 세면 두어 가지, 억지를 부리자면 서너 가지나 알았다. (무엇이든지 제대로 헤아리는 법이 별로 없다.) 사소한 눈짓부터 충동에 가까운 입맞춤에까지 언제나 같은 세기로 공진하는 그의 마음을. 니케포로스가 지나쳐온 모든 장소에 어디든지 파고들어 걷어낼 수 없게끔 끼어버린 살얼음 같은 시간을. 후 불면 사붓하게 날아오르는 소녀의 얼굴을. (이것보다 더 아는데 지금 말하기엔 생각이 안 나니까 어림해서 퉁치는 거다.) 어깨를 짚은 손이 내려갔다가 올라가 목을 받친다. 입술이 포개진다. 힘을 써서 몸을 당긴다. 니케포로스의 손에 들어가면 오십 달러짜리 셔츠도 쓰레기가 되기 십상이었기에 보기보다 조심스러운 몸짓이었다. 단어조차 될 수 없는 억눌린 소리가 숨과 이빨과 혀뿌리에 뭉개지며 어슷하게 오고간다. 이름이 되다가 말았거나 의미 없이 낮게 울리는 비음에 불과할 때도 있다. 이 모든 것으로 하여금 아침을 기억한다. 니케포로스는 빛의 파장이 마음대로 휘어지듯이 스스로를 둘러싼 전부를 보았다. 두 눈이 닿지 않는 부피와 선을 모조리 알 수 있다. 그러나 만지고 나서야 그 감촉이 명확해진다. 희붓한 안개에 색을 덧그리는 것처럼. 무성 영화에 목소리를 씌우는 것처럼. 팔뚝을 붙잡았다가 등뼈를 헤아리려는 손이 잡혔고 서슴없이 눈꼬리와 이마, 광대와 턱으로 입술이 옮겨간다. (이것에 대한 주어는 특정하기 힘들다.) 서로 끊임없이 부딪혔으며 팔꿈치로 누르거나 당겨오고 지탱한다. 또 여기저기로 기울다 못해 간신히 잡고 있는 균형이 어그러지고 나서야 작은 웃음이 터진다. 추울 땐 따뜻하고 더울 땐 차갑게 느껴지는 미지근한 감정. 전염성이 강하고 무엇이든 지워버리는 소리. 귀 뒤까지 따뜻하게 달아오른 몸이 식어간다. 떨어질 유인은 찾지 못했지만 할 말을 찾기에는 힘들었던 니케포로스가 먼저 입을 연다. 뉴스는 애진작에 끝난 지 오래이며 훌륭한 대화 주제가 되는 바보 상자가 내수 관광 진작을 위한 도시 홍보 광고를 방송하던 중이다.
“다음에는 저기 갈까.”
“가봤어?”
선선히 속셈에 걸려든다. 둘은 베어내 그릇에 담을 만한 아침을 행선지 플랜으로 매듭짓기로 했다. 저기서는 이렇게 하고, 가다 보면 찾아갈 만한 사람이 있고. 또 이게 명물이니까 한번 보고 가고. 로키 산맥도 식후경이랬으니까… 가다가 체력이 되면 트래킹도 했으면 좋겠다. 걷는 건 건강에 좋으니까. 그건 싫다고? 알았어, 그럼 그건 말고, 이제 됐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