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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페가 아무것도 바라지 않게 된 이야기 제2탄 인간의 몸은 개미나 가재와 같은 껍데기가 온몸을 감싸서 내밀하고 부드러운 살을 보호하는 갑각류와 달리 단단한 이백여 개의 뼈를 근육이 감싸고 다시 그 근육을 살갗이 감싼다. 찌르면 들어가고 베면 벌어지며 달구었다간 데고 마는 것이 또 얼음에 처넣었다간 얼어서 떨어지기도 한다. 개중에서도 차등이 있으니 이마와 입술이 가장 예민한데 반면 궂은일에 가장 먼저 동원되는 손의 안쪽은 도통 망가지는 법이 잘 없고 감각에 둔하다. 그런데도 필리페는 손이 잡혔을 때 온 신경이 웃풍이 들어 서늘해진 목덜미도 아닌, 언제나처럼 줄 세우는 쓸만한 무기의 나열도 아닌, 오테로 회장의 단조로운 서류 제목도 아니라 다름아닌 잡힌 손에 온통 쏠리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손금을 따라 파인 고랑에 거즈가 들어찬다. 뿌리친다면 뿌리칠.. 2021. 7. 26.
필리페가 아무것도 바라지 않게 된 이야기 “세상에 바라는 게 있다고 총을 맞는 사람도 있나요?” 이불을 끌어내려 그와 마주 보도록 다리를 내려 걸터앉았다. 목뼈가 아파질 참이었다. 볕이 들지 않는 공간이라 맨살이 싸늘한 공기와 맞닿아 조금 추웠다. 새하얗고 초라한 방에 이렇게 있자니 그란 카나리아 남작 마놀리토 오르두나 아로요 오테로는 그의 이름을 채우는 글자의 수가 주는 거리에 비하면 많이 가까워 보였다. 두 눈 중 하나를 골라서 바라보아야 할지 아니면 양안이 멀쩡한 보통 사람을 대할 때와 같이 바라보아야 할지 고민할 정도로 가까웠다. 이 간결한 동작은 느리게 이루어졌기에 할 말을 찾기에 적당한 시간이었다. 집게와 중지를 펴서 총상의 사입구를 짚었다. 설명을 요구한다면 기대에 부응해줄 생각이다. “여기서 한 마디 옆으로 가면 신장이고 조금 위.. 2021. 7. 26.
총검의 자아 한편, 같은 시각. 필리페는 안전하게 집에 돌아갔다. 흔들의자에 얹힌 듯 푹 들어간 몸이 앞뒤로 삐걱댔다. 그립이 목재에 긁혀 달칵거렸다.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는 소음으로 하여금 문 뒤의 아스터가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마가렛은 유명인사다. 뛰어난 무예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영리한 지력은 여기서 아무것도 아니다. 필리페는 마법사라도 ‘마가렛’은 마법사가 아니다. 세상에 인격장애는 많고 눈알 돌아간 사람은 더 많지만 마가렛이 유명한 이유는 단 하나. 마가렛은 절대 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직한 음성이 겨우 문틈을 빠져나왔다. “들어오세요.” 상상한다. 상상 속의 문이 열린다. 그는 새카만 암흑 속의 가느다란 신형을 마주한다. 누구나 총에 맞으면 죽는다. 저것이 마가렛의 전부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면 조금….. 2021. 7. 26.
듣는 데 별로 안 걸리는 이야기 끝내는 데 별로 안 걸리는 이야기를 할 것이다. 이건 사랑에 관한 글이고, 사랑에 관해 난 할 말이 별로 없다. 그건 절망, 과시, 증오, 투지, 분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왜 세상이 사랑을 노래하겠는가? 별로 없어서 그렇다. 어쨌든 아가씨는 오빠를 사랑한다. 강아지와 고양이처럼 사랑한다. 아가씨는 오빠가 슬퍼할 때에는 어깨를 끌어안아가며 달래주었으며 종종 그에게 ‘너는 나의 것이며 나는 너의 것이다’라고 속삭였지만 아가씨는 오빠의 해묵은 소원을 들어준 적이 결코 없다. 아가씨께선 오빠에게 내 명의로 된 금고를 보여주며 소녀처럼 자랑스러워했다고 한다. 평생 돈으로 필요한 만큼의 인력을 마음껏 사서 부리고 비천한 관습을 모르는 대귀족의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병목이 좁은 통에 손을 집어넣고 부와 명예.. 2021. 7.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