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몸은 개미나 가재와 같은 껍데기가 온몸을 감싸서 내밀하고 부드러운 살을 보호하는 갑각류와 달리 단단한 이백여 개의 뼈를 근육이 감싸고 다시 그 근육을 살갗이 감싼다. 찌르면 들어가고 베면 벌어지며 달구었다간 데고 마는 것이 또 얼음에 처넣었다간 얼어서 떨어지기도 한다. 개중에서도 차등이 있으니 이마와 입술이 가장 예민한데 반면 궂은일에 가장 먼저 동원되는 손의 안쪽은 도통 망가지는 법이 잘 없고 감각에 둔하다. 그런데도 필리페는 손이 잡혔을 때 온 신경이 웃풍이 들어 서늘해진 목덜미도 아닌, 언제나처럼 줄 세우는 쓸만한 무기의 나열도 아닌, 오테로 회장의 단조로운 서류 제목도 아니라 다름아닌 잡힌 손에 온통 쏠리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손금을 따라 파인 고랑에 거즈가 들어찬다. 뿌리친다면 뿌리칠 수 있을 보잘것없는 악력에 붙잡혀 가만히 견디고 있는 행위가 고역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너무 당황한 나머지 잡혔을 때 어깨를 움찔하거나 눈썹을 찌푸리지도 못했다. 팔이라도 부러졌나 이깟 하룻강아지 입질만도 못한 상처로 호들갑을 있는 대로 떨어대는 것이… …
어떻지, 필리페 티어넌?
어서 말해봐.
필리페의 성질머리는 유전이라기보다는 잘 만들어진 것에 가까웠다. 가만 보면 대충 사람 구실 하고 사는 요아킴과는 사뭇 다른 양상을 보였다. 요아킴은 잔인하면서도 면전에서 기만하는 일은 없었고 또 말을 마구 거짓으로 꾸며내지 않았다. 이따금 애정으로 가득 차오를 줄 아는 얼굴이 악의에는 충실히 보답할 줄도 안다. 보통의 사람이 낳은 보통의 아이가 바른 교육을 굳이 받지 않으면 강제 없이 자연스레 그렇게 된다. 반면 필리페는 대화를 피하는 자칭 내성적인 성격에 입을 연다면 거짓말이요 비열한 속셈과 잔인한 손속을 결코 좌시하지 않았다. 그건 자기 몫이기 때문이다. 아무 빛깔도 띠지 않는 메마른 가슴, 농담을 경멸하는 센스, 타인의 고통을 모르는 상상력. 하다못해 이렇다 할 취미조차 없는 생활 속에서 필리페를 그 무엇도 아닌 마가렛이라는 이름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 가장 필리페의 본질에 가까운 자들조차 직감했다- 필리페에게 일방적으로 값싼 정을 줄지언정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하기란 어렵다는 것을.
캐번디시는 필리페라는 인간을 만들어보기 위해 보통 상상하는 것처럼 강아지를 키우게 했다가 자기 손으로 죽이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찌르기 등의 야만적인 행위는 하지 않았다. 유행이 지났거든. 아무것도 좋아하지 않게 하기엔 세상엔 달콤한 것이 너무 많다. 알면서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다. 어린 필리페는 세상의 온갖 추악한 인간들에게 맡겨졌다. 필리페의 스승이고 친구이며 부모 노릇을 하던 그들은 아무리 돈 때문에 하는 일이라도 결국 권선징악 스토리텔링 속의 악당이 아니라 인간이었기에 천사처럼 빛나는 금발에 악마같이 새붉은 두 눈을 해서는 자신들을 쭐레쭐레 쫓아다니는 엉성한 꼬마를 좋아하게 되었다. 문제라면 하나같이 준거집단이 인간말종 떼무리고 롤모델은 대량살인마, 머릿속 사상은 둘 중 하나로 대개 귀족혐오자거나 빈민혐오자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이 되겠다. 아이는 쉽게 배운다. 맹목적으로 사랑하고, 오래도록 기억한다. 별달리 할게 없으니까. 캐번디시는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필리페에게도 어떤 잔혹한 트라우마나 그에 필적할 만한 가슴 저미도록 슬픈 과거가 있는 게 아니다. 그런데 사람은 너무 쉽게 물든다. 정도를 걷는 길이 너무나도 어려워서 난세에 영웅이 나면 역사서에 이름이 실리고 대대손손 칭송받는 것이다.
필리페를 가르치던 도축장 주인 가레스는 밤거리에 총 한 정 칼 한 자루와 함께 필리페를 던져놓고는 누가 기분 나쁘게 하면 생각하지 말고 죽이라고 했다. 단,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고통스럽게 죽여서는 안 된다. 그게 수업의 전부였다. 죽으면 다른 사람이 치우고 죽으면 또 치우고 죽으면 치우고 치우고 치우고. 골목길의 사망자 통계가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올라갔다가 어느 정점에 몇 주간 머무르고 도로 내려왔다. 필리페는 싫어하는 사람을 모두 죽였고 좋아하는 사람은 모두 죽었다. 누구도 싫어하거나 좋아하게 되지 않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조금 머리가 커진 이후에는 필리페에게 마약을 시켰다. 정제된 마약의 복용은 필리페의 건조한 영혼에 하늘이 쪼개지고 땅이 무너지는 충격을 주었다. 훗날을 기약하는 희망에 타올랐다가도 암굴 같은 절망의 아가리에 대가리를 들이민다. 어떤 마약은 빛이 번지다 못해 색이 녹아내리는 총천연색에 홀리더라도 금방 송곳으로 정수리를 질질 우벼내는 고통이 뒤따랐다. 아니면 바늘이 손톱 밑을 찔러도 깔깔 웃을 만큼 뇌가 고공행진을 했다. 마약에 절어 있을 땐 기분이 그런대로 괜찮긴 했는데, 이 모든 과정이 끝나고 피에서 마약을 뺄 때는 두 눈알이 밖으로 굴러떨어질 정도로 울었다. 다시는 그렇게 아기처럼 울 일이 없기를 바랐더니 어떻게 되느냐 하면, 강제 각성 상태에 빠져 입술에 클립이 달리고 전기가 통하거나 클래식하게 인두로 지져졌다. 하루가 일 년 같았다. 그다음 날은 반년 같았다. 한 달 같았다. 일주일 같았다. 필리페는 적응을 빠르게 하는 좋은 수감자였다. 그토록 고문받고 나자 아쉽게도 울지 않도록 교정당해서 다시 피에서 마약을 뺄 땐 울지 않게 되었다. 사춘기 청소년을 미치게 하는 좋은 방법 중 하나는 양육자가 일관된 태도를 보이지 않고 제멋대로 구는 것이다. 그 말을 증명하듯 완전히 치료받은 필리페에게 무엇이든 할 자유가 주어지자 그는 카페에 가서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책이나 빌려 온전하게 돌아왔다.
세간에 스스로를 사랑해야만 남을 사랑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럼 자기 존엄성도 장난으로 아는 사람, 평생 처형의 공포에 목을 매달아 놓고 사는 사람, 가슴 속에 저울이 하나 있는데 그 추가 망가져 어디로도 기울지 않는 사람은 어떻지? 필리페는 금방 깨달았다. 내가 아무리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아끼더라도 그건 완전히 같은 마음은 아니겠다고. 그 어떤 측은지심과 동정심도 사랑이 될 수 없다고. 언젠가 어떤 여자아이를 잘해주고 아끼게 되자 필리페는 눈썹을 찌그러뜨리며 웃었다. 항아리에 갇혀 죽은 쥐새끼처럼 버려지고 싶지 않을지언정 여전히 친구 놀음 때문에 아무것도 희생하기 싫다는 사실을 각골했기 때문에. 필리페는 그래도 친구가 뭔지는 알았다. 짧은 대화 때문이었다. 필리페는 여자아이에게 자신이 이기심을 제외한 모든 감정이 도달할 수 있는 비이성의 첨점에는 닿을 수 없다고 말했다. “넌 날 좋아하기 힘들거야. 다들 그래.” 그는 말했다. “그래도 그걸 말할 정도로는 날 좋아하지?” 별것도 없는 게 한철처럼 아름다운 문장이었다. 여자아이와 비슷하다. 그애는 한해처럼 아름다웠거든.
<필리페는 싫어하는 사람은 모두 죽였고
좋아하는 사람은 모두 죽었다.>
여자아이를 생각한다. 왜 친구가 되기로 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정신분석 도서에는 이 안개처럼 희미한 기억이 뇌주름의 부재라기엔 무의식이 표하는 거절에 가깝다는 현상 서술이 있다. 왜 마놀리토와 친구가 되기로 했는지는 아직 기억이 났다. 그건 그가 미안하다고 했기 때문이다. 하필이면 필리페가 가장 너그러웠을 때. 말문은 물론 기가 막히고 코도 막혔다. 사실 그와의 대화는 매번 신묘의 연속이었다. 이유도 가지각색이다. 눈치를 봐서. 아는 게 생각보다 없어서. 뭘 하든 폼이 엉성하다 못해 골탕 먹이기나 다름없어서. 틈만 나면 목소리를 높여서. 빗물이 바닥난 건천같이 강마른 얼굴에 기묘한 명랑함이 차올라 필리페의 눈알을 파버릴 것처럼 짓쳐들어오는 눈빛 하나만으로 숨이 막혀서. 하필이면 필리페가 순전히 쇼맨십으로 자신을 상처 입혔을 때에 그깟 한 숟갈 분량에도 못 미치는 출혈을 감싸 주어서. 그 순간부터 필리페는 결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외이도를 가득 채우던 이명이 이윽고 멎었을 때에야 온몸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책상에 도톰해진 손을 내려놓자 소매 단추가 부딪혀 달강달강한다. 차라리 이 모든 것이 처음 겪는 일이었다면 어이라도 있을 텐데 필리페는 지나치게 터무니없어서 머리를 쥐어뜯고픈 심경이 되었다.
보태주고 싶어.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
신경 꺼.
이건 돈이 드는 일도 아니고, 시간이 드는 일도 아니다. 여전히 그에게 총을 쏘라면 쏠 수 있다. 거짓말을 하라면 할 수 있다. 배신하라면 돌아설 수 있다. 그건 필리페가 가장 잘하는 일이다.
…
..
.
..
…
이 대화가 어떤 산으로 오르든 필리페는 눈물을 질질 짤 용의가 충분히 있었다. 한바탕 울고 나서 구둣발로 이 공간을 두어 번 돌고 씨근거리면서도 차마 말을 되는대로 뱉을 수 없어 젖은 눈으로 노려보노라면 그가 그때처럼 미안해하며 사과해올 것 같았다. 손을 말아쥐어 거둔다. 비껴 섰다가 완전히 등을 보였다. 무거운 문을 어깨로 밀어 열던 필리페는 굳이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 한 마디를 남긴다.
“다음엔.”
도륵도륵 문고리가 반동으로 인해 떨었다.
“말본새 고쳐요. ‘가 봐’가 뭐예요. ‘가 봐’가.”
그리고 대꾸 들을 새도 없이 마놀리토의 눈앞에서 말 그대로 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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