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같은 시각. 필리페는 안전하게 집에 돌아갔다. 흔들의자에 얹힌 듯 푹 들어간 몸이 앞뒤로 삐걱댔다. 그립이 목재에 긁혀 달칵거렸다.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는 소음으로 하여금 문 뒤의 아스터가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마가렛은 유명인사다. 뛰어난 무예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영리한 지력은 여기서 아무것도 아니다. 필리페는 마법사라도 ‘마가렛’은 마법사가 아니다. 세상에 인격장애는 많고 눈알 돌아간 사람은 더 많지만 마가렛이 유명한 이유는 단 하나. 마가렛은 절대 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직한 음성이 겨우 문틈을 빠져나왔다.
“들어오세요.”
상상한다. 상상 속의 문이 열린다. 그는 새카만 암흑 속의 가느다란 신형을 마주한다. 누구나 총에 맞으면 죽는다. 저것이 마가렛의 전부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면 조금…
팅!
어깨를 갈가리 찢어놓는 격통이 먼저요 경쾌하고도 사위를 가르는 소리가 후발대다. 필리페가 자기 집 문에 바람구멍이 나는 것도 아랑곳않고 총을 갈긴 것이다. 망설임, 증오, 분노, 재미, 그 무엇도 해당하지 않는 동기 없이 기계적인 동작으로도 인간은 연약해서 식빵처럼 뭉개지고 만다. 암살자는 하나가 아니다. 등 뒤에서 총알 하나가 빗나갔다. 신이 오늘도 필리페의 편이다. 누구든 필리페를 죽이려거든 조금의 실수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필리페는 두 번 본 것도 잊지 않지만 한번 본다고 쉽게 잊는 건 아니다. 종탑의 꼭대기, 빛에 반사되는 망원조준경을 향해 총알이 날아갔다. 아스터는 부지불식간에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졸려 죽겠네.’
라는 필리페의 상념이 끝나기도 전에 이어 그의 머리가 뚫린다. 아스터. 그는 비행선의 객실 관리인. 아는 얼굴이다. 일단 날 죽이려고 했다고 고자질하면 알아서 알아낸 다음 알려주든 안 알려주든 둘 중 하나는 하겠지. 인제 어쩌지? 어쩐다? 다행스럽게도 룸메이트 셋 중 둘이 외박이다. 날이 바뀌면 행복한 주말이기 때문이다! 필리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쏘긴 쐈는데… 한 놈은 여깄고 나머지 하나는 소식이 없는데 죽었나. 눈알에 맞았으면 좋겠다. 무진장 고통스럽겠지? 마침 방에 남은 룸메이트 하나와는 사이가 퍽 좋다. 소리를 들어 보니 깨어 있는 듯했다. 하긴 인간이 풀썩 쓰러지는데 그 기척도 모르면 안 된다. 필리페가 바닥을 뜯어 뭘 찾더니 눈물을 벌벌 흘리기 시작한다. 금빛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린다. 입술을 깨물어 피가 났다. 손톱으로 옆 방문을 긁으며 똑똑 두드렸다. 뺨을 타고 흐르는 하염없는 눈물이 성대를 짓이겨서 설령 목소리의 주인이 마녀나 악마일지라도 쉬이 동정할 만했다.
“아멜리아… 도와줘.”
“도… 로시?”
착한 아멜리아, 인정 많은 아멜리아. 달칵. 문을 연 아멜리아가 기절한다. 자다 깬 모양이니 얼른 재워야지. 부드럽게 허리를 받치고 침대에 눕힌다. 기억을 없애는 약물을 투여할 것이다. 오늘은 아주 좋은 꿈을 꾸겠지. 미안해, 아멜리아. 하지만 시체를 봐서 네 커리어에 좋을 일이 없다. 아멜리아의 이마를 살짝 쓸어 본다. 땀이 나 있다. 무서웠구나. 잽싸게 일어난다. 또 누가 오기 전 문에 코르크를 채워 넣고 사포질도 할 거다. 필리페의 죄과를 펼쳐 보면 이런 모습이다. 아무리 사람을 죽여 없애도 필리페의 마음은 절대 다치지 않는다. 남을 동정할 줄도 알고 죄책감도 느끼는 필리페가 미치지 않는 비결이 있다. 비결의 결과로 필리페는 고민이 없고 갈등이 없다. 돌아봐서 뭐하나. 쟤가 먼저 쏘려고 해서 저도 쐈어요. 라고 말하기엔 사람을 너무 많이 죽였다. 이렇게 살면 누구든 정신적 상해를 입고 우울증에 걸리거나 이상한 사람이 되거나 둘 중 하나인데 필리페에겐 혼자 멀쩡하다. 비결은 하나다. 총검에는 원래 자아가 없다. 딱히 자신이 누군가의 생을 끝냈다는 생각을 안한다. 벗어나고 싶으면 뭐 빠져나올 수 있는가? 이것도 사람 죽이기 싫다고 징징거린 결과인데. ‘그래, 너는 위험한 일을 너무 시키기엔 아깝구나.’ 하긴 거의 세 명분의 인명을 방패로 보호되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필리페는 아주 오랫동안 아껴써야 하는 물건이라 그렇다. 도로시의 껍데기를 벗겨내려면 적어도 두 명이 수면으로 드러나야 한다. 제대로 도로시를 의심해서 파고들면 또 다르겠으나. 이렇게 나름의 호사를 누리는 필리페는 자신이 너무 소중해서 뭘 희생시키고 이 생활을 끝낼 생각이 없다. 하지만 금 같은 수면시간에 시체를 처리하고 있자니 억울하기 그지없다. 손에서 피를 닦아내다 뜬금없이 부유섬의 주인 그란 카나리아 남작을 생각한다. 신분 감각이 뒤떨어지는 남자, 이 치열한 경쟁 체계 사회에서 혈통을 무시하고 자신의 것을 거머쥐었는데도 하위 계급에 대한 폭력성을 드러내기는커녕 오히려 본연의 인간성을 지킨 듯해 보였다. 순한 얼굴을 애써 일그러뜨리려는지 눈알을 홉뜨고 다니는데 필리페의 눈에는 동그란 토끼눈으로나 보여 웃음거리나 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의 스스럼없는 태도에 배알이 뒤틀렸다. 부럽다. 홀로 그에게 열등감을 가지고 다시 홀로 용서한다. 사람 취급 제대로 받으면서 기분이 나쁘기도 어려운데 필리페가 그걸 해냈다.
‘좋은 하루 보내게.’
차라리 그때 그가 트집을 잡았더라면 영원히 그의 잘난 맛을 용서하지 않았을 텐데. 한심하기 짝이 없다고 비웃어나 줄 수 있을 텐데. 사람을 사 부리는 것은 계층이 가진 특권이요 관습이다. 면제할 수 있는데도 비천한 노동을 자처하는 자는 혐오를 사기 마련이다. 품위를 모르는 자! 체면을 모르는 자! 무슨 까닭으로 부유섬의 주인이 고용살이하는 하인과 다름없이 손가락 열 개 모두를 까딱하며 지낸단 말인가? 기억의 격류를 거슬러 올라 필리페는 별안간…
‘내가 자네를 거슬리게 했나?’
에 머무르고 말았고, 뒤이어 필리페는, 필리페 티어넌은, 도로시 포웰은, 이마에 영근 땀을 닦아내며,
네, 염병을 떠는 꼴이 매우 거슬립니다.
라고 생각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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