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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안의 오베론 기디온 하퍼 블랙허스트의 대학 시절 이야기 “눈 뜨고 보는 것이 무엇이 되건, 진정으로 사랑하여라, 산돼지건, 삯괭이건, 곰이건, 표범이건, 털 난 수퇘지건.” 기디온이 말을 마치자 누군가 짝 하고 손바닥을 부딪혔다. 시선이 한곳으로 몰렸다. 이를 방해한 죄는 컸다. 곧 마지막 단락이다. 그제야 외풍 한 점 없이 방안을 채운 더운 공기를 알아챈 누군가가 창문을 열어젖혔다. 그들에게 허락된 냉방비는 겨우 누워서 숨 쉴 정도였다. 기디온이 엄지와 검지를 마찰시켜 땀을 허공으로 날렸다. 빛을 피해 약간 게걸음을 걸었고, 점잖지 못한 말이 나오려는 것을 억누르며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뿌연 후광에서 몸뚱이가 벗어나자 몇 명이 조용한 날숨을 쉬었다. 각기 다른 장소에서 그랬다면 충분히 조용하다 못해 그 누구도 .. 2021. 7. 22.
창문 밖을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기디온 블랙허스트 십 년 전의 이야기 마지막 학생이 양악을 사리물고 꼬리에 불붙은 여우처럼 재빨리 문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문이 큰 소리를 내며 닫힌다. 장식장이 조금 흔들릴 정도였다. 버드였다. 이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진리가 있다. 누구나 가까이 살수록 지각한다. 아침에 일어나 옷 입고 나오면 된다는 한결같은 생각으로 일 분만, 오 분만, 십 분만. 결국 눈곱도 미처 깔끔하게 씻어내지 못한 버드는 대충 입은 옷에 담요를 두르고 기디온의 집으로 뛰쳐 들어왔다. 외풍이 들지 않는 집은 따뜻했으나 옷 사이를 파고들어 등까지 갉아 먹는 냉골 같은 한기가 아직 가시지 않아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그는 버드를 불러 그새 축축하게 젖은 담요를 난로 곁 의자에 걸었다. 그리고 새로운 담요를 꺼내 주.. 2021. 5. 22.
우당탕탕 주함소의 귀환일기 소색(@sosek0900) 님의 커미션입니다. 주함소, 이름하야 불세출의 천재, 일당백은 기본인 인재, 탑승자 명단에는 일등으로 기재, 입맛은 아재. 한국이 대기권 밖으로 쏘아 올린 작은 우주 함선의 자랑이자 자식뽕의 일등 공신인 주함소는 탐사의 마지막 날만큼은 할 일이 더럽게 없었다. 그녀는 화성에서 온 친구의 편지를 곱게 접어 가방에 집어넣었다. 아주 긴 여행으로부터 돌아가는데 가방 안이 조촐하다. 주함소는 고향에서 몇 파섹은 떨어진 이 외계행성에서 새로 가진 것은 하나도 없고 오히려 잃어버리기만 했다. 함선은 넓었기에 잃어버린 것을 찾기 여의치 않았고 물어보려 누굴 잡을래도 바쁘지 않은 사람 하나가 없다. 이 함선에 탄 고지능 안드로이드들은 오로지 연구와 서비스 제공을 위한 것뿐이어서 눈에 카메라 .. 2021. 5. 22.
보잘것없고 완전한 진짜들의 경주 연향(@hyangzzan1211)님의 커미션입니다. 마법사들의 세계는 쌀쌀하다. 다이애건 앨리의 아무나 지나가는 마법사를 붙잡았을 때 냉혹하게 눈을 홉뜨며 지나칠 확률이 높다는 말은 아니다. 말 그대로 그들의 세계는 쌀쌀했다. 머글의 기찻길이 마찰열로 휘고 있을 때 마법사들은 차가운 불꽃이나 잠시의 멀미, 아니면 허공을 가르는 빗자루로 창백한 푸른 점을 마음대로 유람한다. 그들의 세계에 갖은 집중으로 흐르는 땀을 제외하면 ‘열’이라는 것은 끓는 주전자나 가지고 있지 마법사에게 속하지는 않다. 하다못해 살인 저주도 한번 쏘면 픽하고 기절처럼 쓰러져 죽으니까. 머글의 전투에선 피가 터지면 팍, 뼈가 부러지면 우드득, 비명을 지르면 악 소리가 나지. 그것이 머글과 마법사의 가장 크게 다른 점이라는 게 일반적인.. 2021. 5.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