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색(@sosek0900) 님의 커미션입니다.
주함소, 이름하야 불세출의 천재, 일당백은 기본인 인재, 탑승자 명단에는 일등으로 기재, 입맛은 아재. 한국이 대기권 밖으로 쏘아 올린 작은 우주 함선의 자랑이자 자식뽕의 일등 공신인 주함소는 탐사의 마지막 날만큼은 할 일이 더럽게 없었다. 그녀는 화성에서 온 친구의 편지를 곱게 접어 가방에 집어넣었다. 아주 긴 여행으로부터 돌아가는데 가방 안이 조촐하다. 주함소는 고향에서 몇 파섹은 떨어진 이 외계행성에서 새로 가진 것은 하나도 없고 오히려 잃어버리기만 했다. 함선은 넓었기에 잃어버린 것을 찾기 여의치 않았고 물어보려 누굴 잡을래도 바쁘지 않은 사람 하나가 없다. 이 함선에 탄 고지능 안드로이드들은 오로지 연구와 서비스 제공을 위한 것뿐이어서 눈에 카메라 하나 달려있지 않았다. 혹시 모를 사생활 침해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나 뭐라나. 그래. 오로지 진리만을 위해 우주 삼라만상을 파헤치는 24세기에도 또라이 불변의 법칙은 변하지 않았노니!
안드로이드의 머리통을 몰래 열고 개인 칩을 연결해 그 눈으로 생판 남을 스토킹하는 범죄가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모든 외부 장기 체류 함선의 안드로이드는 영상 기록 장치를 싹 제거했다. 도대체 누굴까? 그 버르장머리없는 자식이… 외부 장기 체류 함선의 경우 어쩔 수 없는 지리적 특성, 그러니까 그 단어가 이 찬란한 광속 워프 시대에도 유효하다면, 인류의 ‘둥지’ 즉 달과 지구, 제1 개척 행성인 화성과 조금 멀지만 에우로파까지. 이 네 개의 행성으로 이은 대사각형에서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바로 그 이유 탓이다. 그럼 법망에서도 자연히 멀어져 그런 범죄에 대처하기 까다로우니 맘에 들지 않아도 도리가 없다. 물론 애초에 잠재적 개자식들을 솎아내는 게 빠르지만 그래도 걸러지지 않는 놈들이 있다. 아! 당연히 원상혁은 매우 건실하다. 주함소가 딱히 원상혁을 개인적으로 좋아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맞긴 하다. 그래도 원상혁은 누가 뭐래도, 그리고 어떻게 평가해도 치졸하거나 냉엄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어리석은 사람조차 아니었다.
오히려 아주 예의 바르고 건전하며 관용의 화신이자 정의롭고 용감을 무기로 언제나 침착한 성정을 유지하는 순결한 인성의 소유자라면 그렇지 않을까? 반박하지 말라. 사실을 왜곡하면 칭찬이 수월해지기 마련이다. 칭찬을 위한 함소의 고군분투를 무시하기만 해봐.
“함소 씨?”
이것 봐라, 말없이 찾아가도 1초 이상 놀라지 않고 젠틀하게 함소를 안으로 안내하지 않는가. 익숙하게 자리를 찾아 앉은 함소가 03년산 백포도주를 내려놓았다. 조금 흔들린 병이 보글보글 기포를 냈다. 상혁은 쭈뼛거리는 티를 내다가도 선선히 함소의 앞에 앉았다. 잔을 꺼내왔으며, 유리에 동그란 상이 맺혀 그의 얼굴이 조금쯤 일그러졌다. 함소는 상혁의 얼굴을 바로 쳐다보지 않고 굳이 잔을 바라보며 미지근한 체온을 상상했다. 아득하고 가까웠다. 이런 생각으로 입을 열면 쪽팔림은 따놓은 당상이겠지. 함소가 짧은 머리를 긁적이려다가 손을 내려놓았다. 상혁이 함소에게 잔을 건넸다. 그는 드물게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상혁이 특히 어지러운 성격은 아니지만 직업 특성상 어쩔 수 없는 때가 있다. 과장해서 말하자면 축사나 다름없던 방 안이 말끔히 치워져 있었다. 아, 참고로 24세기에 소우리니 돼지우리니 양계장이니 하는 것은 없다. 그들은 아무도 죽이지 않고 육식할 수 있는 시대에 살았다.
그렇지만 더러운 장소를 은유하기에 이미 사라진 사어라도 꺼내 쓸 수밖에 없는 시대이기도 하다. 인간의 발이 닿는 곳에 그런 믿을 수 없는 불결함은 있을 수 없다. 인류는 전염병을 정복했고, 정리벽은 찬양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안은 여전히 더럽게 썼다. 아마 수십만 년 후 고대 생물의 발자취를 좇는 외계인이 그런 습성을 본다면 ‘오, 이 종족은 거리는 깨끗한데 정작 생활 공간은 더러웠군요.’라고 할 것이 명명백백했다. 인간과 마찬가지로 3차원을 산다면 말이다. 아마 과일을 묵혀 정신을 잃게 하는 음료를 만드는 것이나 투명한 잔에 유리를 담아 음료의 질을 가늠하려는 행위도 잘 이해하지 못하겠지. 또 무엇을 이해할 수 없을까. 자손을 남기기 위한 유전정보의 그릇이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 끝없이 번성해 생식 활동까지 정복한 이후에도 두 그릇이 만나기 위해 애쓰던 흔적까지 기이하게 생각할지도 몰라.
함소는 먼저 받은 잔을 기울여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위로 쏟아부었다. 그는 잠시 당황했다. 최소한 그런 것처럼은 보였다. 단번에 때려 박기에는 용량이 벅차 보였던 잔이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꼬라지 봐라. 상혁의 손에 힘이 들어가 있다. 둘의 시선이 얽혀든다. 그는 재차 함소의 잔에 포도주를 부었다. 그러자 함소는 겸양을 차치하고서라도 감사의 표시 하나 없이 다시 목구멍을 열고 술을 위에 곧장 쏟아부었다. 상혁의 눈에는 두 번이나 대단한 원샷을 한 함소가 멋있어 보였다. 그리고 그 생각을 함소에게 읽힐까 싶어 입술을 다물고 세 번째 잔을 따랐다. 그녀는 이번엔 얼른 마시지 않고 대신 두 손으로 잔을 받쳤다. 함소는 한참 말없이 찰랑거리는 술이 반 정도 줄어들 즈음에야 침묵을 깼다. 상혁이 입 열 생각을 아예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만 이 대화의 주도권이 함소에게 있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아무런 이유 없이. 그래야 할 의무감이 들어서.
“지구로 돌아가면 뭐부터 할 거예요?”
“가족들이랑 밥 먹으러 가려고요.”
“본가가 지구에 있죠?”
상혁은 멀거니 바닥만 바라보던 눈을 그제서야 함소의 얼굴로 옮기고 네, 작게 대답했다. 그의 눈길에 무언가가 뺨 위로 엉겨 붙는 착각이 들었다. 평소와 다르게 조심스러웠다.
“가면 저랑 점심 한 끼 먹을래요?”
상혁이 저절로 곱아드는 발가락을 어쩔 줄 몰라 하며 대답을 망설일 때였다. 함선의 ‘밤’ 이 찾아왔다. 귀환 파티 때문에 밤을 앞당긴 모양이다. 광량이 졸아들고 안드로이드가 불을 켜시겠느냐고 두 번 물었다. 그것은 충실하게 가장 약한 빛만을 남긴 채 스스로를 종료한다. 은은한 램프 라이트가 함소의 오른쪽 얼굴을 비추었다. 안 먹을래요? 그는 그의 방 불이 초록색이라는 걸 다행스럽게 생각하며 꼭 그러겠다고 말했다. 뭘, 뭘 먹으러 가지. 둘 다 외부 항성계에 오래 나와 있는 바람에 지구 맛집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다. 함소는 그래도 상혁의 답변을 만족스럽게 생각하고 술로 입술만 축이는 데에 집중했다. 그렇게 말 많은 함소의 평소 행동거지를 생각하면 유례없는 일이었다. 그동안 손가락이 몇 번 닿을까 말까 했고, 상혁은 아주 가볍게라도 부딪힐세라 손가락을 한껏 오므렸다. 그럴 때마다 허리와 목까지 움직이는 것을 그 자신이 알까 묻고 싶을 정도로. 그러다 그는 돌연 용기를 가득 끌어 올려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저녁은 안 됩니까?”
함소가 대번에 고개를 돌렸다. 자세히 보면 입꼬리가 안으로 쑥 들어가 있다. 함소는 이런 식으로 웃음을 참았다. 웃음을 참을 일이 별로 없어 남들이 잘 모르는 부분이었다. 그래서 상혁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네, 안 되는데요?”
어? 이러면 안 되는데. 엄연한 현실을 직시하기 어려워 상혁이 눈을 흐리게 떴다. 경솔한 질문이었다. 상혁은 이 기념비적인 업적에 머리 숙여 땅으로 파고 들어갔다. 당연히 이 바닥을 파고 들어갔다간 우주 바깥이겠지만 차라리 얼어 죽고 싶었다. 나가자마자 생각할 수 없을 테니까. 함소가 그 모습을 구경하다 오른손을 들어 상혁의 잔에 억지로 건배했다. 종소리처럼 멀게 들렸다. 상혁처럼 완고한 남자는 흔들리면 깨지고 만다.
“큼, 저녁엔 달에 가야 해서요. 갈래요, 같이?”
뭐? 생각할 시간도 없다.
“그럼. 그럼 제가 사드릴게요.”
“제가 어디로 가는지 알고요?”
함소가 깔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녀는 고요의 바다에 발령받은 은사님을 잠깐 뵈러 간다고 설명했다. 그러니 아주 오래 있지는 않을 거라고. 상혁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래도 가겠다며 긍정했다. 지구에 도착하자마자 달로 떠나야 한다니, 도대체 가족들에게 뭐라고 말해야 좋을까? 살갗 아래로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뛰었다. 자기도 모르게 손바닥을 들었다가 내려놓는다. 고요의 바다에 뭐가 있지? 달의 물가는 상당히 높은 편인 만큼 온갖 종류의 값진 상품이 몰려들었다. 걸림돌이 되는 단어(은사님, 아주 오래, 도착하자마자 등)를 모두 치워버리면 간단한 문장이 하나 나온다.
원상혁과 주함소가 달에서 만난다.
출범 당시의 낭만과 우아함을 잃어버리고 위락 도시가 되어버린 고요의 바다. 멋진 시계를 찬 사람들과 최신 음악이 도처에 깔려 웃음이 메아리가 되어 돌아오는 백 년의 도시. 원상혁이 그런 곳에서 약속을 잡은 것이다. 화폐개념이 남은 유일한 별에서도 관광이 산업의 전부라 도로 포장재조차 신소재로 꾸며진 사치의 중심. 그는 금속처럼 안으로 우그러지려는 심장을 겨우 다잡았다. 그러고 나면 둘 사이가 조금 달라질까? 파도처럼 밀려오는 파동은 어쩌면 우리의 아슬아슬한 다리가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이고 아주 다른 방향으로 튀어 나갈 수도 있다는 기대였다. 함소는 상혁이 잠시 고뇌에 빠져 있는 틈을 타 뒤 소파에 등을 기대앉았다. 소파를 두고 바닥에 앉아 정작 박아놓은 소파는 등받이로 쓰다니 한국인의 습성이 이렇게 무섭다. 함소가 눈꺼풀을 닫았다가 느리게 열었다. 그리고 입도 같이 열었다.
“고요의 바다에선 뭐가 공용어인지 알아요?”
“스…, 스페인어?”
반쯤은 정답일 뻔했다. 바로 옆(물론 순전히 지구의 시점에서 말이다)인 위난의 바다가 스페인어를 공용어로 쓰고 있었다. 상혁은 역사적 사실을 해바라기 씨처럼 까먹기가 일상다반사였기에 이만해도 훌륭했다.
“아쉽게도 틀렸어요.”
“그럼 뭔데요?”
“프랑스어예요.”
정말 예상치 못한 언어였다. 그는 정말 어쩔 길 없이 깜짝 놀랐다. 프랑스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프랑스인 말고 또 있었나?
“프랑스라고요? 거긴 달이나 하다못해 에우로파에도 땅이 일 제곱미터도 없잖아요? 연방에서 쫓겨난 바람에.”
함소가 팔을 뒤로 뻗어 양옆으로 쫙 벌렸다. 소파에 내려놓은 팔이 늘어진다.
“고요의 바다가 달의 제1도시잖아요. 그때의 프랑스는 나름 강대국이었죠. 그때 달로 이주한 부자가 아주 많았어요. 한 절반은 됐을까? 그래서 공용어 투표에서 영어와 스페인어를 압도적으로 이긴 거예요, 프랑스가.”
“민주주의네요.”
“그래서 아마 프랑스는 프랑스가 사라진 이후에도 언어만큼은 남겨두게 될 거예요. 그 문화의 마지막 보루니까요. 약간의 반지성주의와 대단한 그들 특유의 침략적 물신주의까지 함께.”
그리고 그녀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상혁은 그가 매우 잘하는 것을 했다. 입을 다물고 기다리기. 손자국이 묻어나는 잔을 천으로 문질러 닦았다. 잠시 일어나 무릎을 편다. 거의 다 비워가는 병을 몰래 나발로 마셨다. 아까 전의 함소처럼 식도를 열어서 위로 부으려고 시도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는 몇 번 기침을 하고 급히 함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함소는 잠들어 있었다. 아까 이야기는 어떤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취기가 올라서였군. 그는 함소에게 가까이 꿇어앉았다. 얼굴이 너무 자세히 보였다. 아는 얼굴이라 더 자세히 보였다. 모르는 부분이 자꾸 새롭게 나타났다. 그는 애써 정신을 차리고 함소의 팔과 무릎 아래로 손을 넣고 들어 올렸다. 오늘은 귀환 파티가 열리는 날이다. 아무도 이곳으로 내려오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함소를 들고 복도를 걸을 수 있었다. 그림자와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흔들린다. 저 뒤에서 안드로이드가 따라왔고, 그것에겐 센서가 있을지언정 눈은 없었기에 멈추지 않아도 괜찮았다. 다행스럽게도 그가 함소를 방 안의 둥근 침대에 내려놓을 때까지 함소는 단 한 번도 뒤척이거나 말하지 않았다. 문이 열리는 바람에 웅크리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것만이 그의 오늘치 행운이다.
아니, 어쩌면 그만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뒤척이거나 말하지 ‘않았는지’ 아니면 말하지 ‘않으려’ 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까 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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