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디온 블랙허스트 십 년 전의 이야기
마지막 학생이 양악을 사리물고 꼬리에 불붙은 여우처럼 재빨리 문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문이 큰 소리를 내며 닫힌다. 장식장이 조금 흔들릴 정도였다. 버드였다. 이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진리가 있다. 누구나 가까이 살수록 지각한다. 아침에 일어나 옷 입고 나오면 된다는 한결같은 생각으로 일 분만, 오 분만, 십 분만. 결국 눈곱도 미처 깔끔하게 씻어내지 못한 버드는 대충 입은 옷에 담요를 두르고 기디온의 집으로 뛰쳐 들어왔다. 외풍이 들지 않는 집은 따뜻했으나 옷 사이를 파고들어 등까지 갉아 먹는 냉골 같은 한기가 아직 가시지 않아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그는 버드를 불러 그새 축축하게 젖은 담요를 난로 곁 의자에 걸었다. 그리고 새로운 담요를 꺼내 주었다. 버드는 장식장 위에 볼품없이 쓰러진 빈 촛대를 바로 세워두고 자리를 찾아 들어갔다. 주전자가 끓어 하얀 김이 콧속에 파고든다. 결국 버드는 간지러운 것을 참지 못하고 끝까지 작은 재채기 소리를 내었다. 그러자 반대 방향에서 누군가가,
“풋!”
버드가 이윽고 발끝을 세워 바닥에 콱 찧었다. 동작과 다르게 소리가 은밀한 몸짓이었다. 약이 올랐지만 소리라도 냈다간 기디온 선생님이 무시무시하게 쳐다볼 테니까. 누가 웃었지? 물론 기디온은 그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 있었다. 웃지 않으려고 노력하기도 어렵다.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지만 기디온의 집에 숨어든 닭이 조용히 앞자리 학생들에게만 존재를 과시하는 중이었다. 콩! 아 내가 부딪혔나… 콩! 방금 내가 부딪혔나… 콩! 또 부딪혔나… 의 방식으로. 저렇게 졸면서 아프지는 않나 모르겠다. 기디온은 버드의 착각을 굳이 정정하지 않고 끓는 주전자로 시선을 돌렸다. 우선 한 잔 컵에 따른다. 이건 마시는 물이다. 보슬보슬 마른 찻잎을 한 스푼 넣는다. 그리고 남은 물은 다소 두꺼운 어항에 붓는다. 이름은 어항이라지만 물고기가 있다는 뜻은 아니다. 굳이 투명한 어항을 찾아 생물이 익어가는 단계를 생중계하고픈 마음은 없다. 없던 트라우마도 머리에 꽂아줄라. 대신 멀쩡한 공을 콱 잡아 망가뜨렸다. 엄지 모양을 따라 움푹 들어갔다. 그런 공으로 탁구를 치려면 눈물 한 방울 없이는 시작도 못 하겠지. 연민이랄 게 남아 있다면. 그리고 물이 모자라므로 주전자에 다시 눈을 부어 끓였다. 자 지금부터는 서론이 길다. 기디온이 귀 뒤로 머리카락을 넘기고 필묵을 들었다. 보일과 샤를. 재미없다. 그렇지만 아이들은 모두 탁구공이 물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상상하며 과학적 명제를 이해했다는 사실을 재빠르게 어필했다. 과하게 열성적인 수업은 기디온을 춤추게 했다. 그런데 크레이그도 춤추게 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크레이그는 제 딴에는 숨어서 엄폐물 사이로 기디온의 책상을 훔쳐보고 있었다. 그는 훔쳐 듣는 것도 아주 잘했다. 원래 어른이 말하는데 앞에서 얼쩡거리고 그러면 안 되는 법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제법 훌륭한 학생이다. 질문에는 중언부언에 지목에는 딴청이나 피우지만 기디온은 크레이그를 귀여워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그가 올 만한 날에는 의자를 가져다 두기도 했다. 무릎을 모으고 가끔 안경을 추켜올리며 눈은 떼지 않는 크레이그를 위해 오늘은 차를 준비한다. 아이들이 열의 팽창의 예, 그러니까 뜨거운 물에 깨지는 유리컵과 한껏 데워서 여는 잼 병과 같은 아이디어를 내며 종이를 채우느라 바쁠 때 슬쩍 창문을 열어야 한다. 항상 어울려 놀면서 자기들끼리 이야기할 시간을 주면 빼는 법 없이 떠드느라 바쁘다. 작은 창문을 열었다. 일순 바람이 분다. 춥지는 않나? 희한하긴. 오래지 않아 창문이 닫힌다. 검은색 찻잔의 상이 맺힌 유리는 어지럽게 일렁이는 김과 함께 마른 손까지 보여주었다. 기디온은 마치 유령과도 같이 보이는 모습을 바라보다 신경을 끊었다. 그 사이에도 손이 끊임없이 움직였다. 컵을 잡았다가, 내려놓고. 조금 돌아가는 듯싶더니, 바르게 놓인다. 손은 조금 긴 소매에 엄지까지 덮여 있었는데 치수가 맞지 않는다기보다는 추워서 죽 아래로 잡아당긴 결과에 가까워 보였다. 옷이 얇나? 알 길 없다. 크레이그는 꼭 기디온이 바깥으로 목을 빼지 않으면 볼 수 없는 자리에 있었으므로 손뿐이 보이는 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의 오늘 차림새나 수업은 흥미로워할지, 의기소침해 있는지, 간식거리라도 가져왔는지 따위에 생각이 미치기 전에 짐작을 그만두어야 했다. 그는 언제나 단조롭게도 같은 차림새에 같은 표정을 하고 있다. 물론 별로 기분 좋아 보이는 모양새가 아니라는 점은 인정한다. 광대까지 붉은 기가 올라와 바람보다 춥게 느껴지고 무성한 머리카락이 언제나 엉켜 있다. 수만 년 동안 인간이 진화한 결과로 전혀 날 것 같지 않은 물 내음이 난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손톱 끝에서 코를 파고드는 흙냄새가, 그런 감상에 젖어 있다 보면 빛이 바래고 부스러지는 종이 냄새가 난다. 그는 쉽게 몰두했으며 어렵게 집중에서 빠져나왔다.
기디온이 볼 수 있는 것은 언제나 유리에 좌우가 반대로 맺힌 그림자에 불과할지라도 그것만큼은 쉽게 알 수 있다.
손쉽게 그에 대한 생각을 끊어버리고 수업에 집중한다. 달아오른 탁구공이 새것처럼 펼쳐지는 과정에서 그들은 시각적 즐거움과 그 속에서도 농담거리를 찾는 재미에 절여 있다. 아직 따뜻한 공을 돌아가며 한 번씩 쓰다듬어 보다가 수업이 파할 때나 되어서야 ‘이거 그래도 약간 찌그러졌는데 저 가져도 되나요’ 라는 하나 마나 한 질문을 머뭇거리며 한다. 그는 언제나 그렇듯이 선선하게 그러라고 한다. 특별히 독창적인 발상도 아니다. 그가 탁구공을 끓는 물에 집어넣을 때마다 듣는 소리니까. 기디온의 자로 잰 듯 정확한 일상 속에서 이런 사소하고도 판에 박힌 듯하더라도 적어도 깜찍한 발언이라 귀엽다. 하나둘씩 문을 빠져나간다. 닭도 아이들이 우르르 빠져나가자 어리둥절해 하며 까닥거리던 고개를 멈추었다. 그리고 비척거리며 겨우 기어 나와 버드의 발치에 앉았는데, 버드는 그 닭에게 수줍게 인사하고는 계속 닭을 돌아보다 마침내 닭의 이마를 살짝 건드리고 바깥으로 도망갔다. 안녕히 계시라는 인사도 없었다.
다시 어둠이 짓누르는 시간이 돌아왔다. 손때가 묻은 벽의 흔적. 이 끝나지 않는 겨울의 나라에서는 드물게도 잉크가 채 마르지 않은 몇 장의 종이 냄새. 터질 것처럼 뚜껑이 달그락달그락 소리를 내다가 멈춘 주전자의 온도. 그런 것들은 전혀 위안이 되지 않고 그저 시간을 죽이는 데에나 쓰일 뿐이다. 매초 어스름이 드리우는 것 같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은 잠깐 잦아들었다가 땅에 부딪혀 튀어 오르는 공처럼 희미하게 밝아오고 이윽고 호선을 그리며 꺼진다. 기디온은 덜 닫힌 문을 세게 제자리에 끼우고 거실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아주 멀리서 봤으면 사막의 여행자처럼 보일 정도로 질질 끄는 걸음걸이였다. 창문에 손가락이 닿고 걸쇠를 푼다. 찻잔이 비어 있었다. 그리고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지 않고 들어왔다. 예사롭지 않게도 찻잔 속의 물고기가 남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헤엄쳐라. 그리고 돌아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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