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우스와 레일라 드래곤 에이지: 오리진 (DAO) AU
“오자마는 어떤 곳인가요?”
다리우스는 입이 닿는 부분에 도자기를 댄 새 파이프를 왼쪽 무릎 위에 올려놓고 한껏 딴청을 피웠다. 오로지 말을 고르기 위해. 숯불처럼 조용하고 어딘가 안쪽이 들끓는 침묵이 지나간다. 가만히 있기가 싫었던 레일라가 불에 장작을 더 넣으려고 자세를 고치려 하자 “그러지 마십시오.” 소리가 돌아왔고 어쩐지 눈치를 보게 되어 아까처럼 주저앉았다. 어둠 속에서 불티와 연기가 서로 섞이며 공중으로 흩어진다. 분명 이 혈마법사를 잘 알지는 못한다. 그러나 레일라의 눈에는 그가 부모님이 예전부터 혈마법사에 대해 근심하던 것과 같이 잔인하고 맹렬하리만치 비이성적인 인물로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허영스러울지언정 교양이-예의범절과 남들을 흥미롭게 해줄 만한 여러 분야에 걸친 전문적인 지식, 아첨꾼처럼 화려한 언변을 사제처럼 꾸미는 조용조용한 말씨를 비롯한 여러 가지-있었고 주적인 다크스폰과 원수 취급하는 벌레를 제외한 거의 모든 종류의 생명을 충분히 존중했으며 교활한 구석이야 있지만 자기 약점을 굳이 숨기지는 않는 인물이었다. 어쩌면 평생 귀족 영애로 곱게 자란 레일라에게 그의 모난 점이 잘 보이지 않는 탓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레일라는 다리우스를 믿고 싶어했다. 믿었다. 믿을 만했다. 다리우스는 회색 감시자다. 그것은 그가 평생 레일라와 같은 편에 설 것임을 벌써 맹세한 것과 진배없으므로. 바로 레일라가 회색 감시자이기 때문에. 레일라가 피를 마시고 회색 감시자의 일원으로 새로 태어난 바로 그 순간, 그보다 더욱 멀리, 레일라가 아름다운 흰 성벽 안쪽에서 유모의 치마폭을 따라다니며 사랑하는 사람들의 웃음이 세계의 전부이던 아득한 시절부터 말이다. 회색 감시자들 사이에서는 각종 범죄자와 사생아, 혈마법사와 도적놈 같은 쓰레기가 발에 채도록 흔하다는 사실도 다리우스가 혈마법사라는 사실을 망각하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언젠가 한번쯤은 와봐야 하는 장소죠. 제 감상은 그뿐입니다.”
“정말로요?”
레일라가 그 말을 믿지 못해서 ‘정말로요’ 한 것은 아니겠으나 다리우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이어 말했다. “엄청난 대도시라고도 하고요.” 그렇게 말하는 다리우스의 눈빛은 어딘가가 막연하다. 다리우스는 일전에 자기가 예전에 알던 회색 감시자 중에 반은 다크 스폰과 싸우다 죽고 반의반은 인간의 칼과 화살에 죽었으며(이 중 대부분이 오스트가에서의 사건임을 레일라는 그의 표정에서 짐작했다.) 나머지 반의 반은 오자마에 와서 명예롭게 전사했다고 지나가듯 말해준 적이 있었다. 다리우스도 회색 감시자가 된 지가 오래라고 했으니 곧 ‘부름’이 들려오는 나이가 될 테지. 레일라에게도 ‘부름’이 들려올 때까지 삶을 이어갈 행운이 따른다면 오자마로 내려와 명예롭게 전사하기까지 지하 대로를 누빌 것이다.
“어릴 적에는 두렵기도 했죠. 제 무덤이 될 테니까요. 하지만 오자마에 와서 죽으려면 그 순간이 올 때까지 버틸 만한 실력과 행운, 악바리같은 성질머리와 신의 사랑이 골고루 필요함을 깨달았습니다. 그 운명은 과연 누가 부여해주는 것일까요? 개인일까요, 아니면 신이 정해주시는 것일까요? (그는 무릎을 데우던 담뱃대를 떼어내고는 재를 털기 위해 거꾸로 해서 몇 번 흔들었다.) 혈마법사인 제가 논하기엔 불경한 질문이겠습니까? 하지만 우리가 오염된 피를 마신 이상 구울로 변화하는 것은 시간문제일진대 이런 질문조차 신께서 용납하지 못하시리라는 것은 상상하기 쉽지 않군요. 신이라면 관대하셔야지요. 어쨌든, 전 아마 당신 나이 즈음에 오자마에 방문하기 전까지 비슷한 생각을 끔찍할 정도로 많이 했습니다. 가까워질수록 그런 상념이 절 괴롭혔고요. 그러니 부끄럽게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우리가 대단한 인격자라서 회색 감시자가 된 것은 아니니까. 결과론적으로 생각해서 죽을 때까지 다크스폰과 싸우다 고꾸라질 우리보다 대단한 인격자가 되기는 쉽지 않겠지만. 앞뒤가 자리를 바꾸어도 같은 것이 이미 세상에는 많지 않습니까? 또 오자마가 두려운 타당한 이유를 꼽아볼 수 있겠군요. 이곳은 최전선입니다. 오자마가 돌파되면 지상은 무슨 지옥으로 변할까요. 그러나 이 사실조차 오자마에 들어서면 별로 두렵게 느껴지지 않을 겁니다. 오자마의 드워프 전사들은 이걸 가지고 지상인을 실컷 비웃거든요. 매일같이 다크스폰이 코앞을 돌아다니는 오자마의 드워프들에게 이제사 지상에 흉측한 얼굴 빼꼼 보였다고 죽는소리 하는 지상인이 얼마나 우습겠습니까?”
오랜만에 말을 많이 해서인지 목을 조금 축인 다리우스가 잠깐 입을 다문다. 미지근한 물에서는 언뜻 군내가 났다. 쉰내에 가깝기도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텁텁하니 불편한 입안과 구취를 헹궈내기에는 충분하다. 그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오자마가 있다는 방향을 멀리 넘겨다본다. 레일라는 따라다닐 사람이 다리우스밖에 남지 않았다. 첫째로 오스트가에 있던 회색 감시자란 회색 감시자는 모두 죽었으니까. 회색 감시자가 다크스폰을 느낄 수 있는 만큼 그들도 회색 감시자를 느낄 수 있다.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겠지. 그 어디에 숨어도 찾아내 죽였겠고 또 숨을 만한 겁쟁이 새끼들은 오스트가에 없었다. 둘째로 다른 회색 감시자들은 너무 멀리 있다. 테다스 대륙 전역을 통틀어 말하자면 회색 감시자가 적은 수는 단연코 아니겠지만 하루하루가 급한 상황에서 다리우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다른 동료를 찾아다닐 수는 없었다. 마음에 들고 안 들고가 없을 만큼 급한 상황임을 다시 한번 강조하겠다. 그러니까 다시 한번 말하자면 레일라는 따라다닐 사람이 다리우스밖에 남지 않았다. 레일라가 무얼 배우려면 대부분 반드시 그를 통해야 했으나 되레 그래서 다리우스가 가르쳐주는 것들을 온전히 제 것으로 만들지는 않았다. 그가 보여주는 것만 보고 들려주는 것만 듣기에 레일라는 귀족 가문 막내딸이었다. 스승 한 명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는 건 바보짓이다. 레일라에게는 시간이 필요하다.
“저는 가봐야 알 것 같아요.”
“그래도 그들은 회색 감시자를 성의껏 존중하고 환영합니다. 살아있는 한 반드시 지하 대로로 들어가 죽기 위하여 싸우는 작자들을 어떻게 박대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도 오자마가 좋아지겠지요. 하기사 지금 들고 있는 검도 오자마 물건이 틀림없겠군요. 기왕 여기 온 김에 새로이 무기를 맞추는 것도…”
그러자 드물게 말을 잘랐다. “경비가 모자라요.” 돈을 물보다도 허투루 사용하는 사람에게 돈 쓰자는 말을 함부로 긍정해서는 안 된다. 두 사람은 진심 한 스푼이 섞인 어조로 옥신각신하고 말다툼했으며 다리우스가 먼저 자야겠다며 옷을 털며 일어날 때까지 지출 계획을 깁고 더했다. 그는 음침하기 짝이 없는 동료 혈마법사들의 이미지에 전면으로 반하는 생활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도 레일라는 자리에 계속 머물렀다. 바람이 험하게 부는 저 먼 하늘에서 자기들끼리 갈라졌다가도 몸을 붙이는 구름만이 시간의 흐름을 알려준다. 레알라에게는 시간이 있었다. 필요한 만큼 충분히. 생각을 아무리 많이 하더라도 푹 잠들고 남을 시간. 오늘의 레일라와 내일의 레일라가 다를 시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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