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글0/다리우스

오페라의 음치

by 곽제가 2021. 7. 25.

다리우스와 레일라

 

 


 

그는 솔직히 말해서 자신의 은근한 쇼맨십, 리더십, 마지막으로 어이없게 들리겠지만 시티즌십에 은근한 자부심이 있었다. 그러니까 차례대로 <아무리 망한 공연이라 할지라도 스포트라이트의 중심으로 만드는> <표정 하나로 뭇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여 원하는 결과를 만드는> <소왕국 오페라 하우스 입주민으로서의 예절을 지키는> 라는 수식이 붙는 세 가지 요상한 성질 말이다. 

 

그가 누구냐면 다리우스다. 어떤 사람들에겐 좀 생김이 오래되고 낯선 이름이겠지만 어쨌든 그는 누군가로부터 왕의 이름을 받은 다리우스고 관객으로부터는 오페라의 유령이라는 호를 받은 귀신이자 음악의 천사다. 비록 음악적 재능은 미흡하지만. 미안하다. 그는 음치다.

 

오페라의 유령은 반은 태어날 때부터 짐승의 힘줄이 엉겨 붙은 모양으로 얽고 나머지 반은 상서로운 자색으로 빛나는 눈이 썩 보기 괜찮은 얼굴과 귀 두 짝만 있다면야 누구든지 마음을 끄는 목소리로 어린 시절부터… 실은 이렇게 서술해 놓으면 칭송받아 마땅하긴 한데 안타깝게도 공포의 대상이었다. 멀쩡한 얼굴은 반뿐이고 나이를 헤아리기도 전에 말소된 신분도 좀 거식하잖은가. 좋아하는 것보다 싫어하는 게 더 쉽기도 하고. 사람이 이렇게 간사하다. 물론 지각 있는 성인이라면 좀 간사해야 한다는 게 다리우스의 의견이다. 어쨌든 다리우스는 어린 시절 타고난 스타성으로 조명도 좀 떨구고(변명하자면 유지•보수가 제대로 되지 않은 것만 골라서) 그가 작곡하지도 않은 오페라를 가면 무도회에 집어던지며 알고 지내던 소녀 하나를 악마의 재능을 타고난 작곡가로, 또 나중에는 극장의 주인으로 만들었다. 그가 쇼맨십, 리더십, 시티즌십에 이어 오너십도 있다고 언급했었나? 마지막으로 다리우스는 이 인생을 바꾼 한바탕 놀이 덕분에 극장의 적법한 소유권자 중 하나다. 

 

이제 그의 프렌드십에 대해 말할 때가 왔다. 그에게도 친구가 있다. 놀라워하면 안된다. 생각보다 친구 많을걸? 지금은 신예 가수 레일라 프랜시스 반을 소개해보도록 하겠다. 레일라는 홀로 거니는 복도가 무서우면 종종 거들먹거리며 기척이 다 들린다며 기적의 암살자 행세를 했다. 그럼 가끔 다리우스가 걸려들어 한번도 빼놓지 않고 어떻게 알았냐며 나타났다. 오페라의 유령도 착각을 한다.

 

 

“다리우스, 있어요?”

 

 

그러자 마침 지나가던 다리우스가 깜짝 놀라 살짝 구멍난 천장(레일라에게는 바닥이겠지)를 향해 말했다.

 

“어떻게 알았습니까?”

“항상 제 곁에 계시잖아요.”

 

그는 어둠 속에서 좀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으나 별달리 부정하지 않았다. 진짜 들린 건가? 그가 약 30년간 쌓아온 은신 능력이 무용해지는 순간이었다. 생각은 짧다. 요령 있게 지름길을 찾아 정말 유령처럼 레일라 앞에 나타났을 뿐이다. 그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 보이는 모습을 보니 혼자 걷는 게 좀 무서웠나 보다. 

 

 

“청력이 특별하시군요.”

“정말이요?”

“가수로서 정말 큰 재능인데 제가 그것을 가지고 허위를 지어내겠습니까?”

 

 

다리우스가 동행하면 자연히 사람의 눈길과 기척을 피해 멀쩡한 계단과 매끈한 복도가 아닌 험한 길로 가게 된다. 그의 무장은 다름아닌 신비니까. 싫어할 줄 알았는데 레일라는 언제나 자기가 모르는 길로 거침없이 들어서고 장애물 앞에서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다리우스는 처음 본다고 해서 겁먹거나 최소한 주눅 드는 법조차 없는 레일라가 좋아서 가끔은 새로운 비밀 통로를 가르쳐주고 오늘 같은 날은 레일라가 길안내를 하도록 했다. 

 

어디로 갑니까? 

극장주님 집무실에요. 

공연 직전에 굳이 돌아다니셔서 하마터면 도망가려고 나들이를 꾸미는 줄 알 뻔했습니다. 그럼 가시죠. 

 

바깥 나들이를 가는 건 사실 다리우스였다. 자기 허물을 레일라에게 뒤집어씌우고는 망토를 끌러 팔에 걸쳤다. 다리우스가 쇼맨십 보유자답게 꼭 사교계 샤프론 차림을 하고선 광대처럼 절하고 일어나 얼른 걸으라고 눈짓했다. 레일라에게 처음 길안내를 시켰을 땐 자꾸 대신 정해 달라는 듯이 다리우스를 돌아보며 고민했지만 다리우스도 불평하는 바보는 아니어서 곧 그런 행동은 없어졌다. 다만 가끔 “거긴 막다른 길이다” “그래 모로 가도 런던만 가면 된다” 며 툭툭 말을 던질 뿐이다. 레일라는 뜻하지 않은 모험이 신나서 오늘도 두 번쯤 막다른 길로 갔다. 거기서 다리우스가 붙박이장을 열고 반대편 벽으로 통하는 길을 보여줬고 옷장 너머라고 눈발이 날리거나 얼음 마녀가 나타나진 않았지만 먼지 구덩이도 충분히 모험 같았다.

 

레일라는 자주 겁먹는 얼굴이나 제가 할 수 있을까요 따위의 망설이는 태도를 보이지만 그 누구보다도 낯선 경험을 사랑했다. 처음 레일라를 만난 날에도 느닷없이 커튼을 걷으며 나타났는데 갑자기 나타나서든 얼굴 때문이든 장정도 비명을 지르기 마련이나 레일라는 용감했다. 그리고 접때 다리우스가 보트에 태워 약간 냄새 나는 지하 수로를 건너 그의 거처에 데려갔더니 굳이 그 물에 발끝을 담가보거나 거울 앞에는 인테리어로 새파란 비단 머리끈을 걸어주는 것이 아닌가. 그건 머리카락과 클로크를 있는대로 휘날리며 객석이나 무대 한가운데에 등장하지 않는 날에 종종 이용하는 아이템이다. 그때의 다리우스는 사뭇 꺼림칙하게 느껴진다. 레일라는 매번 깜짝 놀라 객석 못지않게 얼어붙어 있곤 하고. 그래서 오늘은 인터미션을 노리려고 한다.

 

오페라의 유령이다! 극장의 괴물이다! 나병을 옮기는 자! 저 살에 닿으면 나병에 걸려 온몸이 썩은 살구처럼 물크러지고 만답니다! 시궁쥐들의 왕! 여보게, 저 자를 잡지 않고 무엇하는가! 내 저자가 쥐새끼들을 거느리고 사람 종아리를 파먹게 명령하는 것을 봤다네! 폭로자! 도시의 그림자에 숨어 살며 우리를 엿본다!

 

 

바늘의 가장자리처럼 뭉뚝하고도 선뜩한 인영이 박스석에 선다. 일그러진 한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언제나 비워 두는 그 자리, 2층 5번 박스석의 커튼이 걷혔다. 사락사락사락. 어떤 눈 좋은 황색 신문 기자가 벌써 어둠 속에서 수첩을 꺼내들었다. 무슨 일이 벌어져도 단단히 벌어지고 있다. 조명 없이 아득한 침묵 속에서 새가 깃털 치는 소리를 내며 불이 붙었다. 밀랍 초다. 뜨겁고 불그스름한 빛이 발산하고 원을 그리며 주변이 달아오른다. 그 어디에도 섞이지 않는 금빛이 스스로를 고립시킨 것처럼 보였다. 오페라의 유령을 마주해본 사람들만이 서로의 귀에 흥분 어린 얼굴로 가십거리를 속삭였다.

어둠이 끼어들 수 없는 동그란 빛의 언저리, 분명하지 못한 경계에서 불쑥 팔이 나타난다. 섬뜩한 긴 손가락이 초를 통째로 잡아쥔다. 일부가 흐트러지며 촛농이 그의 손과 팔뚝을 타고 흘러내렸다. 어느덧 박스석 난간이 촛농에 맞더니 표면부터 바글바글 끓었다. 열을 느끼지 못하는 유령이 충분히 시선을 모으자 남는 손으로 설렁줄을 당겨 자연스럽게 하인을 부른다. 음료를 가져오시오. 

 

 

“내 수하들이 상당히 불미스러운 소식을 전해주어 부득이 찾아왔습니다. ...여기 카스틸리오니 경이 누구인가!”

 

 

어느새 납작한 잔을 손에 쥔 유령이 바질리오 카스틸리오니의 치정과 권력이 때묻은 치부를 낱낱이 드러냈다. 그가 팔을 높이 들자 촛농이 바글거리며 그의 맨손과 팔뚝을 타고 흘렀다. 사슬과 금줄과 자수정 브로치와 녹주석으로 마감한 타이 핀으로 장식한 연미복, 비단을 잘라 만든 조화가 라펠 홀을 장식하고 있었으며 유령은 의중을 알 수 없는 섬뜩한 얼굴로 하여금 관중을 잠재웠다. 경의 시뻘건 얼굴을 갖가지 농담으로 웃음거리로 만든 유령이 무대 장치를 지탱하는 강삭을 타고 내려온다. 잔은 홀랑 내던진 채다. 애도하는 검은 베일을 쓴 귀부인 한 명을 일으켜 비단 꽃을 이빨과 입술 사이에 물리고 밀랍이 묻지 않은 손으로 팔을 잡아 빙글빙글 몇 바퀴를 돌던 유령은 서로에게서 떨어질 즈음 그에게서 아름다운 베일을 빼앗았고,

 

 

그것을 머리에 뒤집어쓴 다리우스는 즐거운 비명과 함께 비산하는 혼란을 즐기며 겨우 관중들을 진정시킨 뒤 남은 공연을 들었다. 공주의 젖자매 시녀 역할을 맡은 레일라가 사랑하는 친구를 떠나보내고 왕자를 증오하여 저주하는 독창이다. 그는 곧 여왕과 손을 잡고 남의 나라 왕자를 독살하는 작간을 친다. 프리마돈나와 합을 맞추고도 지워지지 않는 고음이 총성처럼 머리에 꽂혔다. 은처럼 빛나는 드레스가 사방팔방으로 광택을 자랑하고 요정처럼 보이려고 소품용 색유리와 스피넬을 매달아 늘어뜨린 붉은 머리카락이 나부꼈다. 무대를 압도하지 못하고도 썩 억울하지 않은 프리마돈나도 레일라의 폭발하는 기량이 썩 맘에 들었다. 충분히 노련하지는 않으나 연기라면 탁월하다고 칭찬했을 정도로 아릿한 노래였다. 세상 사람은 다 알고 레일라만 모르는 이야기였다.

 

 

'글0 > 다리우스' 카테고리의 다른 글

회색 감시자의 불가에서  (0) 2021.08.30
D-6  (0) 2021.07.25
D-5  (0) 2021.07.25
D-4  (0) 2021.07.25
D-3  (0) 2021.07.25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