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나랑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나 봐. 아주 잠깐이라도.’
그가 웃었다. 웃겨서 웃은 건지, 아니면 유명해진 이래 처음 자유가 된 게 좋아서 웃은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보자 단말마 같은 비명의 여운이 파동이 되어 멀어지고 완전한 문장의 꼴도 이루지 못한 짧은 생각이 아주 잠깐 대단한 명제라도 되는 것처럼 확대된다. 분명 몇 번쯤 본 얼굴 같은데 가슴 속에 묻어둔 심지에 불을 당기고 해바라기가 웃자라 망울을 터뜨렸다. 마놀리토는 자주 화를 냈고 화내지 않을 땐 인형처럼 가만하거나 몸을 꺾어가며 웃었는데 이번엔 그러지 않았다. 미소지었다. 어색하거나 다른 사람 기죽이려고 비죽거리는 미소가 아니었다. 그래서 필리페는 손을 거의 콧등까지 가져갈 때까지도 제 얼굴에 걸린 표정조차 눈치챌 수 없었다. 물병에 파도가 일듯이 피가 손발로 쏠린다. 피부 밖으로 넘쳐흘러도 모를 것 같다. 필리페는 하루종일 과거에 살고 있었다. 알맞은 말과 행동과 판단을 경험에서 꺼내오느라 여태까지 살아온 모든 순간 속 동시에 존재하고 있던 수백 명의 필리페가 한 명으로 수렴한다. 그의 눈 속에 비친 여자가 참 바보 같고 멍하다. 손으로 얼굴을 더듬는다. 그 여자가 바로 자신이다. 실없는 풋 소리와 함께 꼭 난생처음 친구를 사귄 괴물처럼 여러 개의 하얀 이빨이 드러난다. 보기엔 나쁘지 않다. 누가 보면 찡긋거리며 웃는다고 표현할 만큼. 바람 소리로 시작한 웃음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더니 이윽고 펑 터졌다. 약간 빨개진 얼굴로 웃다가 더 뛰려는지 손가락에 힘을 준다.
‘이제 나도 너랑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싶어. 잠깐이라도 좋아.’
누굴 친구라고 부르는 법이 없었다. 어렸을 때야 친구가 좀 있었다. 말 좀 통하고, 얼굴에 난 솜털 개수나 키 비슷하면 다 친구라고 부르는 나이니까. 마법사가 아니었다면 좀 더 평범하게 자랐을지도 모르겠다. 필리페는 마법사이기에 행운아이고 불운하다. 펠리시티 캐번디시가 종종 생각하기를 ‘이렇게까지 하려는 건 아니었어.’ 옳다. 마법이 주어지지 않았다면 지금 그렇듯 병기로 거듭날 것까진 없었겠지. 또 펠리시티 캐번디시가 이어 생각하기를 ‘원래는 자금 세탁하는 구멍으로 쓰려고 했단 말야.’. 하지만 운명을 비껴갈 순 없다. 필리페는 운명을 믿지 않았지만 사실이 그랬다. 누굴 원망하는 나이가 지났기 때문에 더 생각하지도 않았다. 마음이 가난해서 가진 것만 곱씹기에도 바빴다. 걸핏하면 곱씹곤 하는 사람 중에 애진작에 죽어버린 또래 친구들 얘긴 더 할 것이 없고, 평범하게 늙어 죽은 사람 이야기를 해보자면, 메리온은 성격이 많이 급한 데 비해 육체가 노쇠해져 제 뜻대로 몸이 움직이지 않으니 화가 많은 것 빼고는 좋은 사람이었다.
열두 살 필리페는 마법을 곧잘 배웠다. 모자란 마법사라도 마법을 배우기 시작했다고 보고하자 필리페의 쓰임이 사뭇 달라졌다. 가문의 보물을 손에 쥐고도 배신하지 않을 정도로 충성심이 남달라야 했고, 그 보물을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영리해야 했다. 그전까지 세작 교육 I를 받았다면 세작 교육 IV쯤으로 업그레이드된 셈이다. 바로 이 시기에 필리페가 쓰임새로서는 출중해지고 인간으로서는 망가졌다. 저번에 많이 얘기해서 더 설명할 것도 없다. 이후에 필리페는 웃을 일이 있어도 웃지 않게 되었다. 웃기지가 않았으니까. 웃어야 할 때에나 실컷 웃었다. 그렇게 웃고 나면 정말 웃겨서 웃은 것처럼 머리가 명쾌해져서 기분이 좋았다. 메리온은 자기 농담에 필리페가 웃는 게 진짜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메리온의 센스는 출중했다. 하지만 필리페는 그 농담에 웃기보다 써먹으려고 외우기를 잘했다. 거울을 보며 연습한 표정과 사람을 상대로 실험한 유머는 완벽했다. 원래 모자란 게 많아서 그 정도쯤은 상관없었다. 메리온이 항상 안타깝게 생각했지만. 그래도 필리페는 메리온과 있을 때 가장 많이 웃었다.
현재로 돌아온다. 필리페를 둘러싼 세계가 변동한다. 억눌러도 꺼지지 않는 불이 온몸을 덮고 팔을 높이 든 해바라기가 빙글빙글 제자리를 돈다. 다시 한번 도약하듯 겅중겅중 달려나간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순서를 알 수 없이 도착한다. 아까 말한 대로 이상한 노란색 타이를 고르고 전당포에선 오래된 반지를 샀다. 동그란 안경도 가져왔다. 갈색 머리, 한쪽이 다친 파란 눈, 주제에 안경을 쓴 남자, 누가 봐도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반지를 끼고 온 얼뜨기. 스스로를 잃어버린 표정조차 공중도시의 신묘함에 정신이 어지러워 보인다.
“지금부터 불평하면 버리고 갈 거야.”
사슴 목에 올가미를 씌우듯 그가 반항하기 전에 고리부터 꿰었다. 여태까지 갖은 고생을 다 하고도 고마운 기색 없이 걸핏하면 비명이나 지르는 그에게 느닷없는 복수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타이를 죽 잡아당겨서 목을 거진 조르듯 했는데 손을 떼자 이상하게 자기 목이 졸리는 기분이 든다. 저지르고 나서야 이유가 천천히 찾아온다. 무언가가 바뀌었다. 그는 필리페가 너그러울 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필리페를 너그럽게 한다. 필리페는 그를 사사로운 마음으로 동정하거나 기꺼워하고 심지어는 밉게도 여긴다. 평범한 사람이 가까운 사람에게 종종 느끼듯이. 기대하고 예상하고 용서한다. 꼭 필리페가 마놀리토에게 뭐라도 되는 것마냥.
“진짜야.”
또 조금 웃는다. 용서해 주길 바라면서. 무엇이든. 지금부터 필리페가 엎지르게 될 물이라면 무엇이든.
'글0 > 필리페'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깡패와 엘리트 (0) | 2021.07.26 |
---|---|
필리페가 아무것도 바라지 않게 된 이야기 제2탄 (0) | 2021.07.26 |
필리페가 아무것도 바라지 않게 된 이야기 (0) | 2021.07.26 |
총검의 자아 (0) | 2021.07.26 |
듣는 데 별로 안 걸리는 이야기 (0) | 2021.07.2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