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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0/필리페

필리페가 아무것도 바라지 않게 된 이야기

by 곽제가 2021. 7. 26.

“세상에 바라는 게 있다고 총을 맞는 사람도 있나요?”

 

 

이불을 끌어내려 그와 마주 보도록 다리를 내려 걸터앉았다. 목뼈가 아파질 참이었다. 볕이 들지 않는 공간이라 맨살이 싸늘한 공기와 맞닿아 조금 추웠다. 새하얗고 초라한 방에 이렇게 있자니 그란 카나리아 남작 마놀리토 오르두나 아로요 오테로는 그의 이름을 채우는 글자의 수가 주는 거리에 비하면 많이 가까워 보였다. 두 눈 중 하나를 골라서 바라보아야 할지 아니면 양안이 멀쩡한 보통 사람을 대할 때와 같이 바라보아야 할지 고민할 정도로 가까웠다. 이 간결한 동작은 느리게 이루어졌기에 할 말을 찾기에 적당한 시간이었다. 집게와 중지를 펴서 총상의 사입구를 짚었다. 설명을 요구한다면 기대에 부응해줄 생각이다.

 

 

“여기서 한 마디 옆으로 가면 신장이고 조금 위로 옮기면 간에 위치합니다. 총알의 직경이 있으니 뼈에 맞으면 영원히 이어붙일 수 없었을 것이고 장기를 터뜨렸으면 복구하기 여의치 않았겠지요.”

 

 

말씨가 점점 드문드문 느려졌다. 스스로의 혀가 아니라 오래 전 어떤 의사에게 들은 말을 되풀이하고 있었으니까. 

 

 

네가 어디를 맞아 불구가 된들 위로금이 그것을 보상하겠니. 

 

“제가 어디를 맞아 불구가 된들 위로금이 그것을 보상하겠습니까.”

 

상해 처분에 대해서는 나도 잘 아는데, 

 

“상해 처분에 대해서는 저도 잘 아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이 앞날이 창창한 네게 충분한 정도는 아니더구나. 아무 데도 망가지지 않아서 천만다행이야!

 

“여기서 아무리 생각해도 제게 충분한 정도는 아니더군요. 다행히 저는 별로 다치지 않았지만요.”

 

 

필리페는 오른쪽 눈을 고르기로 했다. 간만에 긴말을 했더니 목이 말라서 맑은 주스를 골라 부득이 그 앞에서 마셔야 했다. 한 모금으로 족했다. 관찰 결과 남작은 이상한 구석에 집착하는 면이 있다. 빚진 마음이 들고 절체절명의 순간에서 벗어난 게 고마우면 돈 주고 치워버리면 되잖아. 오테로 남작이 포웰 나부랭이의 속마음을 알아서 어디다 쓴단 말인가? 의심이 간다면 사람을 보내 뒷조사를 하면 될 일이지 뭣 하러 굳이 맨몸으로 찾아와서 나불거릴까? 필리페는 평생 지능이 높은 사람들과 대거리했다. 하지만 그들은 전후 사정이나 인과를 파악하고자 할 뿐 직접 물어본다는 발상은 별로 하지 않는다. 필리페였어도 응당 그러겠지. 거짓말을 간파할 눈치도 없으면서 물어보긴 뭘 물어봐. 말하면 알아? 진실을 뱉으면 그건 또 알 수 있나? 필리페는 언동을 믿지 속을 알려고 한 적 없다. 남의 속을 헤아리려 하는 건 바보 같은 일이야. 그렇기에 필리페도 쉽게 호의를 주고받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 겉으로만 잘해도 상관없다. 궁금해한 적도 없다. 필리페가 그의 눈을 들여다본다. 파란 눈동자 안에 거울이 한 장 있다. 그 거울 안에 여자가 한 명 보인다. 편하지 못하게 무릎과 발을 꼭 붙이고 앉은 파리한 신형. 하얀 입술에 열 손가락이 유리병을 감싼 채 파랗게 질렸다가 힘을 풀고 혈색이 돌아오곤 한다. 아마 필리페의 눈에도 남작의 상이 맺혀 있겠지. 눈을 잠시 감았다. 다시 떴을 때는 그의 발치와 무릎과 외투를 장식한 브로치를 따라 시선이 올라갔다. 마침내 그의 눈을 바라볼 수 있었을 때에야 말을 잇는다.

 

 

”저는 무엇을 바라서 행동한 게 아니에요. 그런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는 게 맞습니다. 저는 사실 제가 총에 맞지 않을 줄 알았거든요. 하지만 제 팔은 약하고 각하께선 무거우셨죠… 그걸 제가 맞을 줄 알았으면 눈 감고 귀 막고 각하께서 살아있기를 바라기만 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전 판단력이 부족했고 이렇게 병상에 있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라는 것이 있느냐고 여쭈신다면…” 

 

 

바라는 것? 코웃음을 친다. ‘내’가 ‘그’로부터 바라는 게 있을 리가 없잖아. 머리로 네 자릿수 곱셈을 할지언정 양변에 로그를 취하느니 술에 취하는 게 빠른 필리페가 자신을 별로 불쌍하게 여기지 않게 된 데에는 누구나 납득할 만한 경위가 있다. 뒤가 구리긴 해도 캐번디시 가에 충성하는 이유와도 일맥상통한다. 펠리시티 아가씨는 필리페가 실컷 탐미하고 탐식하게 내버려 뒀다. 종종 셋이 식사하여  재력가도 연회 때에나 먹는 음식을 맛보게 해주었으며 귀하고 아름다운 것은 모두 알게 했다. 어쨌든 귀족을 사칭하려면 필요한 일이었는데 그러면서 아가씨는 어리석은 필리페를 보살피며 마치 자신이 요아킴과 혼인한 새신부가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원체 사람이 덤덤했던 필리페에게도 상당한 호재였다. 이후 필리페는 무엇에든 특별한 감흥을 모르게 되었다. 난 더 좋은 거 아는데? 해봤는데. 별론데. 급 떨어지네. 겨우 어린애 하나에게 그런 처우를? 투자보단 투기에 가까운 자본의 투입 아닌가 싶지만 지폐 하나를 꽉 채울 정도로 암호문을 외워 오는 걸 보면 얼추 계산해 보아도 제곱의 가치를 한다. 가장 보람찰 때는 따로 있다. 마도구 미허가 가동을 할 때 배터리로 쓰면 그 값은 충분히 하다못해 눈물이 났다. 마도구의 출처에 대해서 말해보자면 국가에 가보를 등록해 놓는 미친놈은 세상에 없다는 사실로 대신한다. 어느 날은 아가씨가 저택으로 필리페를 불러들였다. 이팔청춘 16세의 일이다. 

 

“너, 마틸드 알지? 목걸이를 잃어버린 마틸드 말이야.”

 

허영 많은 마틸드의 목걸이를 아는가? 약 70년 전 사교계에 휘몰아친 레드 다이아몬드 목걸이 열풍 사건의 주인공, 겨우 빨랫방 하녀 출신으로 제국의 유행을 아래에서 위로 선도한 서른 일곱살 하급 관료의 부인 마틸드, 남편의 성씨가 아닌 자신의 이름으로 남은 세기의 바보 이야기를 모른다고 말하지는 않겠지? 마틸드는 유명해질 것까진 없는 미인 중 하나였다. 분수를 알고 주제를 잘 파악했으나 가정이 학교를 갈만한 형편은 아니었으며 오래 알던 남자와 결혼해 빠듯하게 살림을 꾸려나가던 하고많은 그 시대 여성 중 하나. 그리고 예술계의 큰손인 포레스티에 부인 잔느의 친구로서, 마틸드는 황제의 누이이자 유일한 황녀의 국혼 파티에서 오색찬연한 잔느 포레스티에의 보물, 달걀만한 레드 다이아몬드를 주인공으로 엮어낸 ’잔느의 65다이아몬드’를 목에 걸고 있다 귀갓길에 그만 잃어버리고 만다. 마틸드는 목걸이 상자를 들고 같은 보석상에 찾아갔으나 결혼선물이었기에 같은 디자인의 목걸이는 존재할 예정조차 없었고 결국 허리를 굽혀 바로 그 목걸이를 의뢰한 마틸드는 남편의 봉급과 자신의 체면과 두 명분의 젊음마저 십 년을 팔아 팔아 빚을 변제했다. 

 

마틸드가 유명해진 이유는 그 애달픈 사연과 함께 애당초 그녀가 빌린 목걸이가 원본을 카피한 가짜라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원본은 지하실 구석에 철통같이 보호되고 있었다고 한다. 착하고 어진 잔느는 오랜만에 친구가 찾아와서 기쁘게 수선을 떨다말고 그 소식을 듣자마자 접견실 한복판에서 입술이 찢어져라 괴성을 질렀다. 시녀들이 가짜라고 알고 있던 목걸이를 덜덜 떨리는 손으로 꺼내오고 감정사를 불렀다. 65알 모두 다이아몬드였다. 이후 마틸드의 목걸이는 경매장에 보내졌으며 여러 주인을 전전했다. 그와 함께 수백 점의 카피 목걸이가 시장으로 쏟아져 나왔다. 잔느의 21사파이어, 잔느의 34토파즈… 암묵적으로 다이아몬드는 금했고 또 무엇이든 40개 이상의 보석은 쓰이지 않았다. 마틸다는 전설이자 일약 스타가 되었으며 진품이 된 카피, 마틸드의 65다이아몬드는 경매에 나올 때마다 횟수에 비례하여 가격이 뛰었다. 인기가 절정으로 치솟다 못해 태황후까지 신년 연회에 포레스티에 부인을 찾아가 잔느의 65다이아몬드를 걸치고 나올 정도였다. 그 해에는 모든 아가씨가 비슷한 목걸이를 걸고 나왔다. 사교계는 물론 출판계까지 자연재해처럼 휩쓸어버린 잔느와 마틸다만 빼고 말이다. 둘은 우정의 의미로 두 쌍의 녹안에 맞추어 에메랄드 목걸이를 주문하였다고 한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포레스티에 가문이 주저앉은 후 두 목걸이의 마지막 행방은 묘연하다.

 

이야기가 끝날 때쯤 아가씨는 필리페에게 몹시 낡은 듯한 호두나무 상자를 보여주었다. 상자를 열자 그 안에는 새하얀 실크가 손가락을 감싸오고 잠자리 날개처럼 빛나는 천을 살짝 헤쳐 보니 여태 상상하지도 못했던 미의 극치인 목걸이가 한 쌍 들어 있었다. 잔느와 마틸드의 65다이아몬드였다. 새를 유독 좋아했던 붉은 머리 약혼녀를 위하여 한 무리의 새떼가 공중으로 비산하는 모습을 화이트 다이아몬드로 그려낸 포레스티에의 집념은 좌우에 조금의 오차도 없이 대칭을 이루고 있다. 목 뒤로 잠금하는 이음매로는 보석의 중량을 지탱할 만큼 두꺼운 황금 사슬이 번쩍이고 목걸이가 어깨 앞으로 너무 쏠리지 않도록 추의 역할을 하는 레드 다이아몬드 피닉스가 사슬 끝에 매달려 등 뒤의 미감을 완결한다. 이만 펠리시티가 손수 뚜껑을 닫는다.

 

 

“마가렛, 오래지 않아 이걸 내게 아주 귀한 사람에게 선물할까 하는데 아무도 믿을 수 없구나. 네가 가끔 꺼내보며 지켜 주렴.”

 

 

그래서 필리페는 그렇게 했다. 당부한대로 하루에 다섯 번 꺼내어 몹시 부드러운 천을 쓸어보고 감히 알은 만지지 못한 채 들여놓았다. 조금만 값싸 보였으면 한 번쯤 자기 목에 걸어보고 싶을 만도 한데 그건 필리페의 장기를 다 털어 팔고 가죽 아래에 마약을 가득 채워 인형으로 팔아도 금액을 충당하지 못할 것만 같았다. 16일째 되는 날 아가씨가 말했다.

 

 

“하나는 네가 가지렴. 보관이 어려울테니 은행에 금고를 열어주마. 후일 너의 결혼식에 이 목걸이를 걸어줄게.”

 

 

그런고로 도망치면 국물도 없다. 필리페는 당돌했다. 

 

 

“둘 중 무엇이 잔느의 65다이아몬드고, 무엇이 마틸드의 65다이아몬드인가요? 왼쪽이 진품인가요? 오른쪽이 진품인가요? 저는 어느 것을 가지게 되나요?”

 

“진품이라니. 쌍둥이가 같지 않듯 각각의 사연을 가진 별개의 보석이란다. 하지만 너에게는 잔느의 65다이아몬드를 주마. 네 표현에 따르면 진품이니……”

 

“……”

 

“숱한 가짜 중 단 하나의 진짜란다.”

 

 

작고 마른 손이 잔느의 65다이아몬드를 정확히 일흔 일곱번 어루만졌을 때, 필리페가 더이상 아무것도 이것 이상으로 아름답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을 때 아가씨는 그것을 필리페에게 주었다. 그날 밤 목걸이에 위용에 걸맞는 드레스를 걸치게 하고 대단한 가면 무도회에 보내 남의 콧구멍에 마약을 투여하고 돌아왔다. 이렇게 말하니 황무지처럼 감성이 메말라 보이지만 분수에서 초콜릿이 하늘에선 금박이 떨어지는 엄청난 파티였다. 대개의 임무는 단 3분도 소요되지 않아서 나머지 시간은 오로지 향락이었다. 저택으로 돌아가며 곱씹어 보니 그것만이 필리페가 가질 수 있는 진짜라고 말씀하신 듯했으나 돌에는 죄가 없지. 이제 필리페의 마음에 차는 화려함은 열어보는 데에만도 끔찍하게 비싼 금고 안에만 있다. 사전에 기술되어 있는 ‘갖다’의 제 1용례로 가지지는 못했으나 가끔 금고를 찾아가 목에 걸어보는 것쯤은 허용되었다. 감상은… 무겁다. 은행 밖으로 나오면서도 이상하게 뻐근하다. 그때마다 필리페는 ‘하도 육중해서 모가지가 뒤로 꺾이는 일은 없겠군’ 했다. 그 뒤로 필리페는 누가 환심을 사려고 뭘 갖다바치더라도 싸구려라고 매도하며 욕망하지 않았다. 당연히 마가렛 앳우드가 비슷한 옷 한 벌이라도 걸칠 여력이 있었겠냐만 부의 정점을 맛보니 내려오기가 쉽지 않다. 여기서 슬픈 점을 하나 짚고 넘어가고 싶다. 썰리고 터져도 신음 하나 내지 않게 된 데에도 누구나 납득할 만한 분명한 경위가 있기 때문이다. 자, 이 주제는 다음에. 어디 보자. 제일 처분하기 쉽고, 간단하고, 뒤끝 없는 건, 생각하기도 싫다. 돈으로 주든가. 

 

 

“그냥 돈으로 받고자 합니다. 꼭이요. 그럼 제게도 심심한 위로가 되겠습니다.”

 

 

주스를 제자리에 돌려놓는다. 더이상 할 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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