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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0/필리페

깡패와 엘리트

by 곽제가 2021. 7. 26.

둘은 백열등과 그림자 사이에서 숨을 몰아쉬었다. 그제서야 항구의 바닷물이 전해오는 짠내가 끼어들었다. 한순간 달아나듯 고개를 숙인다. 마놀리토는 말랐지만 덩치가 웬만해서 필리페가 빛으로부터 완전히 숨겨졌다. 햇빛이 남기고 간 화상처럼 달아오른 얼굴을 어떻게든 가리고 싶었다. 라펠을 한껏 틀어쥔 손아귀를 펼치자 손톱에 긁혀 하얗게 자국이 나 있었다. 이거 비싼 옷일 텐데. 그래서 그것이 보이지 않도록 손바닥으로 덮어야 했다. 그의 구두코에도 발자국이 많이 났다. 거기까진 가리기가 여의치 않아서 떨어지려는 몸을 다시 그에게로 기울였다. 귀를 가까이 대자 옷 너머로 생명력을 뿜는 심장 소리가 웅성거린다. 어쩌다가 이렇게 됐을까? 필리페는 가끔 그를 부를 때 호칭을 얼버무렸다. 그렇게 아무런 사이도 아닌 사람으로 남고 싶었다. 가슴속에 정으로 쪼갠 구멍이 하나 있어서 가만히 있는데도 기우는 감정이 찰랑찰랑 바깥을 향해 우르르 쏟아진다.

 

“저번에 나한테 절대 거짓말하지 말라고 했잖아.”

“응.”

 

참지 못하고 조금 위를 올려다보자 그의 얼굴이 막 젖은 유리처럼 투명하게 빛났다. 충격이었다. 섬세한 왼손이 뺨까지 올라갔다가 천천히 모가지와 팔을 타고 내려갔다. ‪팔꿈치의 오금에는 엄지를 얹고 그리고 바깥쪽을 손바닥과 나머지 네 손가락으로 감싸서 아주 가볍게 ‬잡는다. 웃는 표정이 꽃이고 눈과 코와 입가에 둥글게 패여 고여 있는 그림자가 물이라면 육체가 화병이겠으며 깡패새끼인 필리페야 고작 썩은 이파리를 쳐내는 가위 한 자루에 불과하다. 필리페는 잘생긴 얼굴을 보면 퍽 기꺼워서 감상을 일으키는 외모를 많이 봐오고 또 그 얼굴들이 세부적으로 어떻게 다른지 그림으로 그려서 알려줄 수도 있다. 미인계에 얼굴을 붉힐 만큼 어수룩한 때는 지난 지가 오래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는 마놀리토의 얼굴을 보면 꾹 올라오는 뜻 모를 수치를 가다듬어야 했다. 낯설고 부끄럽다. 다른 이름이 많겠지만 필리페는 그 감정을 수치라고 불렀다. 

 

“내 말은 하나도 믿지 않아도 좋으니까…” 

 

지금 당장 죽고 다시 한번 인간으로 태어나 자랄 때까지 그가 필리페를 기다려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새로운 생이 더욱 불행해도 좋으니까 이 나를 벗어던져도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필리페는 아무렴 학창 시절은 검정고시로 공부는 주요과목 위주로 알아서 독파했다. 대학도 안 갔다. 아니. 못 갔다. 스테이크 한 점 제대로 앉아서 썰어본 적 없었다. 소고기를 가성비로 먹다니 기가 찰 노릇인데 지금도 그렇게 한다. 거… 미국산이나 한우나 맛도 별로 차이 없는데 대충 사다가 구워 먹으면 되지. 안 그런가? 생일날 누구는 고오급을 찾으러 다니는데 필리페는 값비싼 음식을 먹어버릇 못해서 피자에 핫소스나 뿌려 먹었다. 싸구려 혓바닥에 샥스핀이니 캐비어니 하는 것을 먹어 보았지만 입맛만 버렸다. 그렇게 편식하는 음식이 참 많았다. 다만 2주에 한 번씩 머리를 다듬었다. 그게 검정고시 출신 깡패년이 제깟게 사법고시 수석으로 검사가 되어 떨 수 있는 최대한의 교양이었다. 법조계는 인맥이라지만 재벌가 아가씨가 뒤를 봐줘서 천만다행으로 태평했다. 왕따는 피할 수 없었지만. 비극이었다. 평생 자기보다 윗사람이랑 아랫사람은 있는데 동등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없었다. 실은 로스쿨 동기들한테 조금 기대했다. 하지만 로열 로드를 걸어온 엘리트들이 그들만의 리그에 필리페를 끼워줄까보냐. 평생 친구 없는 삶이 재미없게 구르다가 마놀리토를 만나서 멈췄다. 어찌나 차가웠는지 마놀리토 앞에 선 그는 감정 한 점 쏟을 가치가 없는 버러지였기에 필리페를 싫어하지조차 않았다. 아마 그래서 더 진절머리 나도록 거슬리게 굴었나 보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울고 싶었다. 그래도 진짜 울기엔 자존심이 있지 참아 보기로 했다. 다행히 필리페는 참는 것 하난 참 잘했다. 하지만 할 말은 참지 못했다. 할 말을 참지 않는 삶을 살아왔기에 그랬다. 스테끼를 씹지 못하는 만큼 뿌리처럼 굳어버린 생활이 핏줄처럼 도드라졌다. 입에서 아직 담배 냄새가 나고 주머니에 대충 꽂아넣은 안경이 휘며 고통을 호소했다. 이제쯤 뭘 말하려고 했는데 머릿속에서 휘발되어 사라졌다. 구질구질 B급 영화의 한 씬이다.

 

“... ...무슨 조건을 달아야 할지 모르겠어. 너한테 내가 조건을 달아도 되는지 모르겠어.” 

 

그는 필리페가 스스로의 처지를 참을 수 없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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