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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0/일마

일마/유디트 들불연 로그 (TRPG X. 세션 다녀오기 전 개요로만 작성)

by 곽제가 2021. 7. 22.

“원래 사람들은.”

 

 

손을 거두자 눈앞이 약간 밝아졌다. 매섭게 끊어쳤던 말을 잇는다. 유디트는 돌아보지 않는다.

 

 

“건방진 걸 나쁘다고는 하지 않아.”

 

 

하지만 넌 어쨌든 건방진 새끼야. 카우치에서 일어나자 잠깐 사방이 빙글 돌았다. 익숙한 일이다. 상관없다. 복도를 가로지르며 가죽 슬리퍼에 발을 도로 끼웠다. 아까 점심 식사하기 전에 마음대로 걸어 다니다 잃어버린 것이었다. 나머지 한 짝은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 이 오래되고 형편없이 낡은 슬리퍼는 개미새끼 팔에도 들릴 만큼 얇아서 슬리퍼를 신으나 마나 걸음에 불편함이 별로 없었다. 유디트의 생각과 달리 일마는 슬리퍼만큼이나 얇은 유리창을 열고 그 위에 걸터앉았다. 슬리퍼 유실 메들리가 시작될 판이었지만 이 자리에 일마를 만류할 만큼 미친 황후 발바닥의 안위에 신경 쓰는 사람 따윈 없었다. 유디트의 뒤통수는 어디 갈비라도 맡겨 놨는지 잽싸게 멀어졌고 궁인은 창문에 사람이 버젓이 있는데도 모른 척 지나갔다. 발이 어찌나 잰지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래, 일마의 눈에 띄었다간 좋든 나쁘든 신세를 망칠 게 분명하니 뒤꽁무니 빠지게 뜰을 가로지를 수밖에. 일마는 사흘에 한 번씩 방을 바꾸게 되어있었다. 쪽지 한 장 숨길 수 없었고, 비밀을 털어놓을 카나리아 한 마리 없는 삶이다. 일마가 고아 새끼 유디트를 (그냥 유디트다. 석 자 뒤에 아무 이름도 붙지 않는.) 근위기사로 요구하지 않았다면 일마는 대화 같지도 않은 대화를 나눌 사람 없이 혼자 피아노나 칠 운명일 게 뻔했다. 어쨌든 일마는 유디트의 머리채를 간신히 잡지 않는 선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를 매일같이 참았고, 유디트는 사회성이라고는 옛저녁에 없어진 신데렐라 미친년의 배부르고 등따신 투정을 비슷하게 참았다. 하지만 둘의 인내심을 비견한다면 일마의 것이 훨씬 짧아서 보통은 길바닥의 상스러운 욕설과 함께 대화가 끝나곤 했다. 그리고 둘의 근무 시간을 비견한다면 유디트의 것이 훨씬 짧아서 다행스럽게도 하루 종일 입씨름을 할 필요는 없었다. 그래도 일마는 유디트를 기다렸다.

 

시계가 보일 때에만.

 

나머지 시간에는 황제가 명한 대로 목숨만 대충 붙여놓는 삶을 살았다. 일마에게 배정된 예산은 무척 적어서 궁인에게 배급되는 향기 없는 비누와 뛰어난 기예 없이 재료를 쌓은 것에 불과한 식사, 세 벌이나 겨우 있는 모슬린 드레스, 도서관의 아무도 찾지 않는 책, 황후가 손수 조율해야 하는 피아노 따위로나 유지되는 빈궁한 생활이었다. 아마 유디트의 목숨이나 주둥이 값도 무척 쌀 것이 뻔했다. 일마의 손에 들어오는 건 다 그랬다. 일마가 감당할 수 있는 건 다 그랬다. 일마가 원하는 것도 다 그랬다. 일마는 살면서 욕심부린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자 주변이 덤으로 채워졌다. 납으로 만든 화장품, 고래뼈를 기워 만든 속옷과...

 

 

“동정은 값싸지.”

 

엠파이어 드레스를 꺼내들었다. 일마는 이게 엠파이어인지 뱀파이어인지도 구분하지 못했다.

 

“이 드레스는 비싸.”

 

드레스를 뒤집자 짧게 떨어졌다. 

 

“동정은 간편하지.”

 

담요처럼 말아 던졌다. 대번에 볼멘소리가 튀어나왔다.

 

“백성을 쥐어짠 세금은 어떻고?”

 

최신 유행은 발목이 보이는 디자인이지만 일마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동정만큼 진정한 감정이 또 있을까?”

“그럼 도대체 뭘 바래?”

 

 

그렇게 묻자 일마는 ‘호선을 그리며’ 웃었다. 유디트는 하염없이 긴데도 관리하지 않아 이리저리 엉켜 있던 머리카락이 아주 잠깐 단정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심부름을 하나 해 줘.”

“뭔데?”

 

 

일마가 손을 뻗자 엠파이어 드레스의 나비 리본을 고정하는 보석 장식이 뜯겨나간다. 일마의 손에서 한참을 구르던 보석은 친유성이 있는지 깜찍한 손자국이 난 채로 유디트의 손에 떨어졌다.

 

 

“내일 비가 온대. 우산을 하나 갖고 싶어.”

“네가 우산을 사서 뭐 하게?”

“비 속을 걷고 싶거든.”

“요조숙녀가 싫다더니 공인된 광인이 되려는구나. 알겠어.”

 

 

유디트는 오랜만에 일마와 상호 간에 예의 있는 약속을 했다. 곧 내일 비가 오는 걸 어떻게 아냐고 물어봤지만 묵살당한 것을 빼고는. 특이사항은 따로 있었다. 약속한 것으로 기분이 좋아졌는지 일마가 애진작에 수건으로 쓸 줄 알았던 엠파이어 드레스를 입어보기까지 한 것이 아닌가! 이건 숙소에 돌아와서 이상한 일이었다. 그래도 귀한 설탕 뿌린 찐 감자만큼은 중요하진 않았다. 유디트는 아무리 커도 과분한 음식에 환장하는 편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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