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마&아르하&유디트&슈테판
한 속눈썹이 얼어붙은 남자가 눈길을 가로질러 걷고 있었다. 이 지방의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 머리는 검고, 흰 피부에, 덩치가 그저 크거나 마냥 작지 않아 이렇다 할 특징이 드러나지 않는 그 남자는 이따금 얼굴에서 얼음 알갱이를 걷어내기 위해 잠깐 멈추어 설 뿐 막막한 동토 위를 끊임없이 나아갔다. 등 뒤에서 낮고 어두운 태양이 차갑게 번쩍인다. 그렇게 남자는 열의 반대편, 각막미란을 야기하는 잔인한 빙하지대가 이루는 완전한 빛 속의 검은 구멍이 된다. 넘어질 만한 균열이나 손을 들어 쫓아낼 벌레 하나 없었으므로 계속해서 움직일 수 있었다. 잠시라도 멈추면 손톱 밑부터 조각나 깨질 듯한 고통이 밀려와서 그는 더 아프지 않을 때까지 걸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얼굴을 문지를 즈음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한편 남자는 잠깐 어깨 뒤를 돌아보았다. 노을 없이 기울며 숨져가는 태양에게 등을 보이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래도 그는 이렇게 밝기를 훔친 전깃불 같은 빛이 마음에 들었다.
멀리서 보면 남자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지만 어쨌든 범인이 맨몸으로 따라가기엔 어려울 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남자는 그래도 걸을 힘이 남아 있었다.
광야를 지나쳐 얇은 얼음과 두꺼운 얼음을 모두 건너고도 그는 아무에게도 발견되지 않았다. 해가 땅을 딛고 퉁겨 일어났다. 그는 가만히 백야를 더듬어 생각한다.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다시금 해가 움직이는 동안 내내. 세상을 반으로 가르면 남자의 내도록 걸어온 발자국이 그 가운데에 있고 스스로는 그걸 몰랐다. 오른발을 아주 살짝 박찼다. 떠가는 얼음 위에서 균형을 잡으려고 발을 옴지락거린다. 발밑에 웅크려 있던 그림자가 남자의 몸짓을 따라 턱을 까딱거렸다. 그는 그러고도 한참을 얼음에 얹혀 여행했다. 그림자가 반쯤 토막 나고 거기서 또 반이 토막 날 때까지. 왈츠로 빙글빙글 돌아도 충분했던 바닥이 점차 깨지고 부서지다 이윽고 궁둥이를 붙이기도 힘들게 좁아질 때까지.
시간이 흘렀다. 무게를 이기지 못한 얼음이 어느 순간 깨지고 훌쩍 이리저리 기울었다. 다음에 벌어진 일은 물리법칙에 의거하여 당연한 수순이었다. 발이 틈새 사이로 빠지고 끼이려다가 얼음이 완전히 벌어져 몸이 순식간에 아래로 쏠렸다. 부피가 수면을 때리며 잠깐 큰 소리가 난다. 온몸이 잠긴다. 그는 반사적으로 감았던 눈을 살며시 뜬다. 흐드러지는 물거품이 몇십 초에 걸쳐 입술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것들은 이리저리 서로 부딪히거나 수압을 이기지 못하는 식으로 터지고 수면까지 떠오르기도 했다.
세상에 죽음보다 달콤하게 들리는 단어가 또 있는가? 말을 탄 기수가 인간의 숲을 베는 신화 속 세계의 죽음, 붉은 꽃도 한철을 가지 못한다는 권력의 죽음, 아름다운 집시 여인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무리는 어째서 그리 많아 사장의 모래알에 견주어도 모자람이 없는가? 속눈썹이 얼어붙은 남자는 죽음에 대해 잠시 생각하고 사랑에 관해 또 생각했다. 그가 사랑을 남겨둔 여러 가지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죽음이 이중 특별히 누구의 얼굴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 죽음은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로 온다고 했는데, 눈을 뜨든 감든 소금물과 남자가 뱉은 공기 방울밖에 보이지 않았다.
가끔은 사람이 죽어도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 누가 소리를 지르거나 눈물을 흘리며 이마께로 천을 덮어주는 일은 없었지만 천천히 남자의 눈이 감겼다.
밤이 하도 길어 달의 움직임을 기다리기까지 지루하기 짝이 없는 영원이 걸렸다. 일마가 문고리에 손을 얹는다. 그러자 시야 한켠에 장애물이 불쑥 들어온다. “비밀번호를 쳐야 해.” “아닐걸.” 유디트는 문을 열면 으레 들려야 하는 전자음이 손바닥 사이로 사라지는 광경을 ‘보았다’. 벌써 몇 번 봤는데 꽤 즐거운 일이다. 어느새 일마가 신발에 묻은 흙을 바닥에 문대어 털고 있었다. 얼른 따라 들어오지 않으면 문을 열어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들어가자. 요정이 대문으로 들어오면 그림자는 창문으로 나간다. 현관을 이용하는 이유는 따로 없다. 창문은 너무 도둑 같고, 뒤뜰을 이용하기엔 당당하지 못하니까. 우리가 부모는 없어도 가오가 있잖아, 그지? 둘은 신발을 콩콩 바닥에 두드리고는 곧장 등을 보이며 갈라졌다. 유디트는 지나가다가 아르하를 마주친다. 참새가 방앗간 지나치랴 그는 잠깐 멈추고는 아르하 앞에서 손을 흔들고 뺨을 만졌다. 잠시 후회한다. 그는 외로움을 느꼈다. 아르하를 따라다니며 그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틀을 닫아준다. 창을 닫아준다. 문을 닫아준다. 아르하가 기시감을 느끼며 눈을 깜빡일 땐 입을 닫아주었다. 아르하, 그거 아니? 그러고 있으면 입에 파리 들어간다. 또 후회한다. 그는 그리움을 느꼈다. 겁쟁이처럼 뒷걸음질을 치는데 일마가 말을 건다. 깜짝 놀라 하마터면 발을 구를 뻔한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귓가에 목소리를 꽂는 재주는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잖은가. 어쨌든 일마는 그렇게 할 수 있었다. 타일과 벽, 유리와 접시를 관통하고 속삭이는 바람이 유디트에게 날아들었다.
“이쪽은 다 됐어.”
“걔가 얼마간의 시간을 들여 이거 알아냈을 거라고 생각하니?”
일마는 별로 생각하지도 않고 대답했다.
“몰라.”
대꾸가 금방 돌아오진 않았다. 으레 안 물어봐도 줄줄이 소세지로 말을 걸던 놈이 입을 다무니 일마가 점점 가까워졌다. 몰래 문을 열었다 닫고 살금살금 걸어오는 꼴이 우스웠다. 드디어 일마가 나타났을 때 유디트는 일마의 눈에 비친 어린 소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옅은 금발, 새파란 눈동자, 많이 작은 키, 볼과 배때기엔 살이 있지만 뼈를 헤아릴 정도로 말랐고, 굽은 허리는 펴진. 마지막으로 소매는 일마가 접어서 손목에 딱 맞는. 그건 유디트 자신이었다. 그는 제 것이 아닌 것을 둘이나 가지는 바람에 올곧게 인간으로 죽을 권리를 박탈당했다. “너 커피 머신 가스켓은 닫고 오는 거니?” “그게 뭔데.” “얼른 다녀와.” 그런 것 따윈 상관없이 사과같이 붉은 뺨의 유디트가 짐짓 잘난체하며 턱을 치켜들었다. 시비는 자격이 없어도 걸 수 있기 때문이다. 일마가 투덜거리며 그놈의 커피 머신 가스켓을 찾으러 간다.
“도어락은 이따 열어.”
“알았어. 내가 바보는 아니야.”
이건 발끈한 거다. 자기가 도어락이 뭔지도 모를 것 같냐며, 그래 너 같은 노땅은 모를 것 같아서 일러 줬다며, 늙은 게 누군데 감히 자길 노땅이라 부르느냐며 아옹다옹하는 다툼이 길게 이어졌다. 입으로는 실컷 싸우면서도 두 아이가 서로 도와 찬장 문을 열었고 유디트가 먼지 쌓인 물잔을 뒤집었다. 뒤집어야 할 컵이나 그릇은 더 없었다. 일마가 확신하지 못하는 투로 유디트의 어깨를 툭 쳤다.
“그게 끝이야?”
“어.”
두 번 물어보지 않는다. 가스켓이 커피 머신 말고 다른 데 있진 않겠지? 금세 둘이 의자를 딛고 아래로 내려왔다. 거실로 나가자 원탁에 둥그렇게 앉은 아르하가 세 명쯤 더 보였다. 그의 뒷모습이 잘못 찍은 사진처럼 흐렸다. 눈을 찡그리거나 더 가까이 가도 마찬가지다. 아르하는 아르하에게 말한다.
“저를 여기서 내보내 주세요. 아무것도 열리지 않아요.”
어른인데 저렇게 말하니까 꼭 옛날 같다. 딴생각과 별개로 의식이 시작된다. 인간이 들어설 수 없는 세계와 몸 없는 이가 들어설 수 없는 세계를 잇는 세 장의 거울이 생명을 얻고 그림자가 길어졌다. 새까맣게 녹은 물이 지붕에서 떨어져 덩어리를 이루더니 각각의 얼굴마다 일곱 개의 구멍이 파이고 눈과 코와 입과 귀가 될 때까지 뭉그러지다가 묘한 각도로 굳기를 반복한다. 아르하의 머리 위에도 하나가 또아리를 튼다. 이갈이를 하는 것처럼 문고리나 사람의 살과 커튼봉과 유독 큰 놈은 의자 다리까지 들어가는 거라면 무엇이든 아가리 안으로 집어넣어 우물우물 맛을 보았다. 몸 없는 세계의 하위 포식자, 먹힐수록 작아져 생긴 것이 찌끼와 다르지 않고 그들은 아르하의 주장을 음해하고 부정할 준비로 만만하므로 긴장할 때다. 놀라워하기 전에 어쨌든, 이 세상 그 누구든 공짜로 일하는 건 누구나 싫어하니 따뜻한 사랑과 포용으로 감싸주도록 하자.
“거짓말쟁이. 화장실에 약병 하나가 굴러다니고 있어.”
“아니요. 닫혀 있어요.”
“부엌에 있는 우유갑은!”
“닫혀 있어요.”
앞에 있는 아르하가 입술을 깨물었다. 입술을 깨무는 게 버릇인 듯했다. 그들은 아르하와 질답하는 동안 자주 자리를 바꾸었고 일마는 그걸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은 반면 유디트는 누가 어떻게 다른지 손쉽게 분별할 수 있었다. 마침내 팔꿈치로 책상을 괴는 것이 버릇인 아르하가 손깍지를 끼고 중얼거린다. 숫제 인간의 얍삽한 꾀에 당했다는 투였다.
“정말이네. 집안의 모든 틀이 닫혀 있어.”
“틀이 닫혀 있으면.”
“문도 닫혀 있어!”
“우린 검은 옷을 입은 죄수를 도와줘야 해.”
“어쩔 수 없지.”
아르하는 기다리는 말이 나올 때까지 한참 기다린다. 마침내 모든 말을 감탄처럼 쌈싸먹는 아르하가 외친다. 우린 검은 옷의 죄수를 도와줘야 해!
“넌 어디에 사니?”
“온몸이 얼어붙을 정도로 춥고, 수 일을 걸어도 아무도 보이지 않아요. 여름엔 해가 지지 않지만 그 빛은 싸늘해요. 얼음이 지독하고 바람은 눈알을 파내요. 사람은 가끔 있지만 저는 외로이 살아요.”
“좋아. 찾았어. 이제 밖으로 내보내 줄게.”
의자가 뒤로 드륵드륵 끌린다. 아이들도 몇 걸음의 간격을 두고 아르하를 따라갔다. 며칠간 사람이 통 드나들지 않은 문은 생김새가 차가워도 계절이 여름이라 미지근했지만 문을 열기 바로 직전에 신발장에 둔 외투를 챙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명한 처사다. 모자와 목도리와 외투 두 겹과 장갑과 마지막으로 신발을 챙겨 신는다. 이상한 일이지만 조금도 덥지 않았다. 방한용품을 껴입는데 자꾸 귀가 먹먹해와서 그때마다 입을 벌려 귓구멍에 낀 기압을 해소해야 했다. 준비가 다 되었고, 그는 가져갈 것이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을 때 문을 열었다. 집안의 공기가 바깥으로 빨려 나간다. 아르하가 성큼 한 걸음을 걷고, 머리털 하나까지 사라지고 나자 문이 평생 내본 적 없을 꽝 소리와 함께 문틀을 다물었다. 그리고 마법이 꺼진다. 검은 옷의 죄수는 빛과 환상이 만발하는 마법이 아니라 폐를 채우고 살갗에 달라붙는 마법이므로 세찬 썰물처럼 물살을 이루며 바깥으로 쏟아져 나가더니 무릎을 휘청거리게 했다. 요정 둘의 목에 낀 건 특별히 기침을 몇 번 하고서야 남은 덩어리가 콜록거리는 음정에 맞추어 갈 길을 간다. 일마가 눈짓해서 문을 다시 연다. 이제 평범한 문이다. 이제 다시는 특별한 문이 될 수 없겠지. 어느 쪽이든 슈테판 선생님을 기다리게 할 순 없다. 눈발이 아니라 밤바람이 둘을 반겼다. 그는 계단을 세 개쯤 내려가 앉아서 책을 읽는 중이었다. 이젠 분위기 하나 끝내준다고 어두운 데서 책 읽는 시대가 지나갔다는데도 마다하고 그 자리에 쭉 있었던 것이다. 난간에 오른쪽 어깨를 기대고 있다가 인기척을 느꼈는지 일어나 뒷짐을 진다. 곁눈을 팔자 딱히 빨간색은 아니고 동화책이었다. 기대했나? 기대는 말고. 그에게도 취미가 아주 많으니까.
“다 되었니?”
“적어도 우리가 아는 선에서는요.”
성실한 선생님이 한 손에 하나씩 꼭 손을 잡았다. 책은 다른 두 사람이 나누어 들기로 눈치로 무언의 합의를 본 지가 벌써 4초나 되었다. 직전에 일마가 망설이긴 했어도 한사코 마다하기엔 슈테판 선생님을 사랑했다. 원체 애가 그런 걸 입으로 말하는 성격은 아니지만 슈테판 선생님은 이미 그 사실을 알 것 같았다. 왜냐하면 일마는 슈테판이 일마를 사랑한다는 걸 알았으니까. 일마의 그런 생각은 유디트의 실없고 위대한 명언과 함께 허물어졌다.
“요정은 불멸한다고 하잖아.”
“응.”
유디트는 건성 어린 대꾸에 별로 개의치 않고 의견을 개진했다.
“인간이 요정만 남겨두고 모두 죽어버려서 그런 말이 남았을거야.”
“내가 외로워 보이니, 지혜로운 유디트?”
“아니. 꽤 오래 산 것처럼 보여.”
두 사람의 대화는 슈테판의 질문과 함께 끊겼다. 그는 언제고 배움에 세월이 없다고 생각하는 쪽이었고 오랜만에 방문한 세상은 너무나 빠르고 음악이 흥겨웠다. 게다가 신문물에도 놀랍도록 적응하는 재능이 있다. 일마야 뭐, 슈테판이 뭘 물어봐도 가르쳐줄 상식이 없어 말을 얼버무렸지만 유디트는 슈테판과 이야기하는 게 좋고 또 자신이 잘 아는 분야라 하나를 물어보면 연쇄해서 일곱 가지 정도를 답해줬다. 슈테판은 결국 말재주에 당해서 사람 없는 펌프에 올라가 발장난을 쳤다. 물론 마지막에는 재즈 카페에서 껍데기는 올드, 알맹이는 최신식 전축이 틀어주는 20세기 음악을 들었다. 세 명의 취향이 겹치는 유일무이한 대중문화였기 때문이다.
어디로든 통하는 검은 옷의 죄수 의식에는 세 가지의 준비물과 한 차례의 지난한 노동이 필요하다. 첫째, 원탁. 신분의 고하와 주인과 손님의 순서를 구분할 수 없도록. 둘째, 마주 보고 곁에 둘 거울 세 장. 주인은 하나요 손님은 세 명이 된다. 셋째, 검은 옷을 차려입을 것. 하지에 성공한 사례가 많다. 일 년 중 가장 밝은 날에 가장 어두운 시각을 고른다. 원탁에 세 장의 거울을 놓고, 집안의 불을 모조리 끄되 달빛은 가릴 필요가 없으며 해가 뜨기 전까지 집안의 모든 틀을, 테두리를, 입구를 막아야 한다. 일을 마친 후 의자에 앉았는데, 의식이 성공한다면 당신은 거울 속의 자신들이 당신을 쳐다보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만약 하나라도 열려 있다면 의식은 그대로 실패한다. 패널티로 목숨이나 그림자를 앗아가지는 않지만, 닫았던 것을 도로 모두 열기 전까진 바깥으로 나갈 수 없다. 어쨌든 그들이 당신을 바라본다면 성공이다! 이제 “검은 옷의 죄수가 계약을 이행하길 요청합니다.” 라고 하면 그들이 화장실 프로작이나, 우유갑이나, 물잔 따위가 열려 있을 거라고 우길 것이다. 아니라고 답하되 당황하지 않길 바란다. 거짓말만 아니라면 그들은 곧 수긍할 테니까. 질문에 질문으로 돌려주는 등의 행위는 금물이며, 반드시 평서형으로 단정하듯 말해야 한다. 틀이 닫혀 있으면 문이 닫혀 있다. 그들은 아주 오래전 검은 옷의 수도사와 계약했으며, 당신을 검은 옷의 죄수로 인정한다면 당신이 어디로든 갈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빛이 너무 적어 밖을 분간하기 어렵기에 그들은 이렇게 묻는다:
“저 문을 열면 밖에는 뭐가 있지?”
그럼 당신은 가고 싶은 곳을 말하면 된다.
아르하는 책을 찢어 품속에 집어넣었다.
아르하는 일마가 앉았던 자리에 앉았다. 유디트는 아르하더러 조금 더 가까이 오라고 했다. 그리고 아르하가 그렇게 했다. 할 말이 정말 많았던 것 같은데 모두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왜 하필 지금 생각나는지는 모르겠지만 유디트는 옛날에 이런 순간이 오면 울고 말 거라고 술안주 우스갯소리로 지껄였던 과거가 있었다. 막상 닥치니 아르하의 얼굴을 좀 더 제대로 보고 싶었다. 아르하는 어떤 마음으로 울지 않는 걸까?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 아니면 슬픔이 아무것도 아니게 된 걸까? 맛없는 채소를 싫어하던 기억이 흐려지고, 어린이 특유의 치밀하게 레시피의 이변을 잡아내던 혀마저 나이를 먹으며 무뎌진 것처럼? 하지만 지금은 그런 얘기를 나눌 때가 아니었다. 두 사람은 옛날이야기로 서두를 열었다. 대화 중 상당한 분량이 재밌고 귀여운 에피소드였다. 사실관계를 정정하고 항변하는 창과 방패의 대결이 지속되었다. 문득 유디트는 지금 당장 해야 할 말이 뭔지 깨달았다. 유디트가 선물받은 총명은 예기치 못한 순간에 찾아와 멋대로 거두어졌다. 반짝 빛을 발하기 전의 그는 나이가 적든 많든 보통의 어리석은 전쟁고아였지만(고아라기엔 나이가 좀 부끄러울 만큼 많아도) 시기적절할 때 빛을 발했다.
“너를 그때 데려오지 말았어야 했나 봐.”
살다 보면 사람은 영원히 살 수 없지만 영원히 기억할 수 있는 순간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사람의 영원은 백 년, 장미의 영원은 삼 주, 그의 운명이 허락한 시간은 고작 30초. 아주 잠깐만 시간을 더 주세요. 손가락에 매달린 실이 점차 끊어질 것처럼 얇아진다. 이윽고 아르하가 입술을 여는 순간 유디트의 심장이 영원히 깨졌다.
“그래.”
단추를 꺾자 손난로가 하얗게 얼더니 이윽고 열을 내어서 무심코 떨어뜨렸다. 한여름에 어디서 찾았는지 모르겠지만. 삑삑대는 기계가 가늘고 길게 우는 소리를 낸다. 일마는 유디트를 기다리며 어디에서 찾았는지 모를 손난로를 가만히 의자에 올려두었고, 유디트보다 아르하가 더 민첩했는지 까만 머리통이 먼저 보였다.일마를 두고 간 아이였던 어른이다. 그는 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다. 열고 나왔다기에는 어른이라면 비집고 나와야 할 정도였다. 아이라면 활짝 열린 셈에 가까웠다. 차례로 지나간 유년이 나온다. 아무것도 확신하지 못하는 어린아이 같은 얼굴이었다. 일마는 그 표정을 알기도 하고 모르기도 했다. 정상이다. 대부분의 요정이 그렇듯이 일마와 마찬가지로 경계 없이 부정不定한 존재가 되었으므로. 일마가 일어나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가 더 가지 않고 옷자락에 손을 턴다. 그리고는 조금 체구가 작은 그를 위해 조금 몸을 숙여 소맷단을 세 번 그리고 반쯤 접어주었다. 옅은 금발, 외눈박이 사파이어, 뺨은 사과같이 붉고, 얼굴엔 작은 사선 한 줄 없구나. 육손잡이 일마가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손을 맞잡아왔다. 유디트는 설원이 보고 싶다고 말했다. 노망이 아니라 진심이었냐고 묻기 전에 잠시간 생각하다가 알겠다고 말한다. 소설가가 아니더라도 종종 가위손이나 거미에 비유하는 넓은 손이 하얗고 마른 손목까지 단단하게 감싼다. 꼭 누나와 동생처럼 서로 반대로 찍힌 눈물점과 먼 곳을 바라보는 애늙은이 유디트, 그리고 제 나이를 먹은 아이이기도 어른이기도 한 일마는 순전히 우연으로 같은 설원을 생각했다. 다름 아닌 그끄저께 기후 변화로 환경 운동과 의식 개선을 촉구하는 다큐멘터리에 배경으로 등장한 시베리아의 극동 지방 베르호얀스크였다. 같이 병원 TV로 봤다. 평년 기온 영하 40도를 자랑한다지만 요새 기후 변화로 덥다고 했으니 반팔 차림으로 가도 충분하겠다. 이따 깨닫겠지만 오판이었다.
“좀 더 세게 잡아. 물이나 모래를 잡는다고 생각해.”
다행히 나무를 투박하게 깎아 만든 실패는 물이나 모래 따위보다야 훨씬 붙잡기 쉬웠다. 말대로 유디트가 곱아들어 굳어버린 손아귀에 좀 더 힘을 준다. 일마는 아르하가 충분히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실패에 간신히 매달린 실 끝을 유디트의 다른 쪽 손가락에 묶어주었다.
“이제 네 시간의 주인은 너야. 하지만 너무 오래 걸리면 안 돼.”
그런 주제에 하는 말은 ‘나는 운명의 신 따위가 아니야.’ 일마는 도망치듯 병실을 빠져나간다. 문이 완전히 닫히고 나서 그 위에 손바닥을 짚자 웅얼거리는 대화가 거짓말처럼 사그라들고 만다. 서 있기 싫어하는 게으른 발이 다른 의자를 찾는다. 일마가 낄 자리는 바로 여기였다. 대화가 들리지 않는 거리. 하지만 날 찾으러 오면 잡아 줄게. 대신 날 똑바로 불러야 해. 왜냐하면 ‘일마’는 마법으로 이루어졌으니까. 일마를 똑바로 부르려면 뭐라고 불러야 할까? 일마는, 일마 아이혤은, 엘프리드는, 엘프리드 빌헬미네 트로타는, 이름을 되찾고 나서도 자기 이름에 어색해하는 기색을 보였다. 어딘가에 골몰하고 있으면 일마라도 불러도 대답하지 않고 엘프리드라고 불러도 대답하지 않았다. 인간으로 살았을 때 주구장창 어른인 척하다 보니 동생도 없는 주제에 언니나 누나라는 말에는 잘 대답했다. 지금은 일마의 친구들 이야길 할 거니까 일마라고 부르기로 하자. 일마에겐 또래 친구가 몇 있었는데 그들은 거의 지상에 남아 돌아오지 않게 되었다. 요정으로 남으면 영원할 수 있는데도 그렇지 않았다. 실은 일마에겐 요정으로 남을지 인간으로 남을지 따위의 선택권이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그걸 어리석은 선택이라거나 원망하는 식으로 매도하지는 않았다. 일마는 그냥 일마였다. 지금 이야기에 중심 인물로 등장할 유디트도 그냥 유디트였다. 어느 순간부터 유디트는 일마를 맨눈으로 보지 못하게 되었다. 유디트가 나이를 너무 많이 먹어서였다. 그때쯤 다른 애들도 마찬가지였다. 일마는 그게 참 심심해서 지상에 자주 놀러 가지 않게 되었다. 삼하인의 밤에 가끔 찾아가면,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일마에게나 가끔이고 시간이 몰아치는 격랑 한가운데 살아가는 지상의 인간들에게는 일, 이 년에 한 번쯤이었는데, 그때마다 유디트는 일마보고 그대로라고 하고 일마는 유디트를 보며 너무 많이 바뀌었다고 생각했다.
유디트가 다 크고 나서 갑자기 아르하의 아버지가 되어 유디트 일 라니루가 되었다. 생각보다 금방 입에 붙었다. 일마는 아르하가 자길 볼 수 있는 시간 동안 많이 다정하게 생각하고 아껴 주었다. 어떤 크리스마스 날 아르하가 “일마 누나가 어디 갔지?” 라고 한 뒤부터는 알아서 나다니길 멈추고 집에나 박혀 있기로 했다. 예상했다. 다 마찬가지였다. 아르하가 마지막이었다. 이렇게 친구들은 일마만 냅두고 자기들끼리 늙어갔다. 너무 순식간에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다음에 봤을 땐 벌써 머리가 한두 가닥씩 희게 세었다. 뽑았더니 화내긴커녕 몇 가닥이나 더 있냐고 물었다. 일마는 털 골라주는 원숭이가 아니니까 더 뽑진 않았다. 이상해진 점은 더 있다. 일마가 나가재도 나가지 않고 일마를 제자리에 앉혀 놓는 요령으로 다루었다. 일마는 아직 유디트를 생각하면 피아노가 보이는 먼 자리에서 연주를 훔쳐보는 소매 큰 꼬마가 떠올랐다. 하지만 정말로 일마가 만날 수 있는 유디트는 이상하게(이 말에 유디트는 발끈했다) 웃었고 백단과 오우드 내음이 물씬 나는 어른 향수를 뿌리고 다녔다. 명품이라고 설명해 줬는데 흘려들었다. 그런 유디트는 친구 같았는데 가끔은 너무 멀어 보였다. 아르하도 너무 빠르게 어른이 되었다. 일마는 아르하가 하는 일 중 모르는 것이 참 많아서 나중에는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일마가 열네 살이 되었을 즈음이었다. 일마는 아직 갈색 멜빵 바지가 곧잘 어울리는 여자애였다. 아르하는 어른이 되었다. 어른이 된다는 건 그러니까 설명하자면 이렇다: 부드러운 손바닥으로 들꽃을 건네주던 꼬마는 온데간데없고 겨울을 진흙으로 빚어 만든 사람이 된 것이다.
“이젠 네가 나보다 뭐든지 잘하네.”
“걱정 마. 눈 깜짝할 새 할아버지가 될게.”
“나보다 빨리 자라는 건 괜찮아. 하지만 나보다 빨리 늙지 마.”
“왜?”
“그냥. 그냥 안 돼.”
일마도 알고 아르하도 알았다. 일마가 왜 그 말을 했는지. 차이점이 있긴 했다. 일마는 모른 척했다. 아르하는 눈치 못챈 척 했다. 이때쯤 한 가지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말하자면 일마는 귀신, 신비, 창문가로 날아든 선물 같은 것. 아직 지상의 친구들은 일마 인생의 일부였으나 귀신과 신비와 선물은 예기치 못한 사태일 뿐 동등하게 대할 수 없다. 친구들은 너무 빨리 자라버린 탓이엇을까 분명 조금씩은 자라고 있는 일마가 변화하지 못하는 것처럼 생각했다. 이를테면 얼음 동상, 추억, 어머니가 물려주신 반지 같은 것. 일마는 시간을 견디는 자리에 서 있었다. 피할 수 없었다. 인정하기 싫었다. 우리는 이제 예전 같은 사이가 아닌 거야. 너희들은 나를 1936년에 두고 떠나온 거야. 다른 시간을 산다는 건 그런 거야. 일마는 원래 외로운 마음이 들지 않아도 이사벨을 찾아가곤 했다. 하지만 지상에 다녀오고 나면 꼭 이사벨에게 가서 “뭐해?” 하고 물었다. 그러면 이사벨은 딱히 놀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아도 일마와 자주 어울려 놀았다. 보답으로 일마도 놀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을 때 이사벨과 나가서 과일을 찬물에 씻어 먹고 물수제비를 연마하는 장난을 쳤다. 사랑한다는 말과 마찬가지로 둘은 서로에게 고맙다는 말따윈 하지 않았지만 알고는 있을 거라고 일마는 생각했다. 이사벨은 딱히 일마와 함께 지상으로 올라오려고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지금 옆에 있었으면 뭐라고 했을지 궁금했다. 그럼 기분이 좀 나아질 것 같았다. 일마는 이유를 설명하기 싫어했지만 이유가 당연히 있었다. 예니에게 더는 이런 걸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할 땐 표정을 보지 않으려고 애써야 했지만 이사벨은 사흘 밤낮도 가기 전에 새로 좋아할 만한 것을 가져다주었으니까. 울적해진다. 이번엔 이유를 설명하지 않기로 한다.
709호 환자는 자꾸 일마라는 여자아이를 불렀다. 일마가 누구냐고 물어보면 친구라고 답했고, 몇 살이냐고 물어보면 아마 열여섯 살이나 열일곱 살일 거라고 손가락으로 가늠했다. 그는 일마에 관해 어지간한 물음에는 다 답변해 줬지만 완전히 노망이 들진 않은 모양인지 혼잣말을 하면서도 사리 분별은 꽤 잘했다. 일마는 상당히 까다롭고 냉소적이었다. 듣기로는 그랬다는 것이다. 간병인과 간호사, 의사들은 환상 속 동물에게 관심을 전혀 두지 않았지만 한 의사가 아침 문진을 왔다가 아무도 없는 휠체어가 평지에서 3m를 굴러가는 모습을 목격한 이후 일마라는 환자가 이 병실에서 죽은 적이라도 있는지 15년이 족히 된 서류 일체까지 뒤져보는 대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또 일마라는 유령의 목격담도 전해지는 말이 없다. 곧 그들은 709호를 무서워하게 되었다. 709호 환자와 유령과의 대화는 괴담이고 소문이었다. 막상 들어 보면 무섭진 않다. 자랑이거나, 기억이거나, 조언이거나, 질문이거나, 눈앞에 상대방이 보이기만 했다면 적당히 슬프고 들어줄 만한 토막들.
"일마, 그게 얼마짜리 휠체언지 알아? 625불을 지불하고도, 달마다 12불의 기름을 더 채워 넣어야 움직일 수 있는 휠체어야."
"예니, 고 계집애가 봤다면 공산주의의 산물이라며 혀를 끌끌 찼을거란 말이지. 그래도 난 좋아. 걸을 수 없는 사람을 걷게 해주니까."
"아르하가 휠체어를 밀어주고 싶어 했어, 이따금."
“그럼 뭘로 헤아릴 건데?”
당연히 해 바뀌는 걸로 세지, 멍청아. 일마가 발로 침대 기둥을 툭 찬다. 사회 질서에 전면으로 반하는 행위였다. 이에 노인이 주먹을 흔드는 시늉으로 응수한다. 딱히 위협적이진 않았다.
“그러고 보면 움직이는 의자에 더는 안 타니?”
“힘들어서.”
유디트가 고개를 돌려 일마를 쳐다보며 대답했다. 일마는 끄덕끄덕 바퀴를 움직이는 중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병상에 자리를 얻어 앉는다. 부자는 부자인지 노인 하나가 눕고 말만 한 여자애가 앉아있는데도 병상 주제에 전혀 좁지 않았다. 일마는 충분히 기다렸다. 그동안 바람이 창문을 때리고 풍압이 일어서 창가에 둔 스위트피가 몇 차례 고개를 젓는다. 일마가 나갔다가 들어오기를 두어 번쯤 반복한다. 사람이 계속해서 드나들었다. 그들이 자기들끼리 뭐라고 말했는데, 유디트는 자느라 듣지 못했고 하필이면 일마도 나가 있을 때였다. 그렇게 하루가 꼬박 지났다. 유디트도 눈을 뜨고, 하염없이 눈만 뜨고 있다 거의 기다리기 싫증이 날 즈음이었다. 그가 도로 눈을 감았다가 인기척에 눈을 떴다.
“자?”
하얀 침대보에 껄끄러운 주름처럼 누워있는 노인에게 갈색 머리 꼬맹이가 건네는 것으로는 제법 뒷말이 짧다. 유디트는 아니라고 말했다.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깨어난 유디트가 흐린 눈을 벅벅 비볐다. 마음만 그랬고 실은 스친 것에 불과했다. 늙어간다는 개념은 버스를 양보받을 때나 더 이상 양주병 들 힘이 없을 때보다 눈앞의 요정을 마주했을 때 비로소 명확해진다. 일마는 ‘삑삑대는 기계’ 앞에 서서 한참 그래프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 얜 항상 페이션트 모니터를 가리켜 삑삑대는 기계라고 했다. 유디트는 그걸 자주 정정해 줬지만 도통 들어먹지 않았다.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발을 반 바퀴 돌려 서자 일마의 얼굴이 드러난다. 햇볕 아래서 가장 흐려지는 요정의 얼굴이 오늘따라 횃불처럼 분명하다. 그는 뭘 하나 눈치챘다고 티 내는 대신 심술을 털어내기로 했다.
“너는 왜 늙지를 않아?”
얼굴을 찌그리고 바짓단을 툭, 털어내는 일마는,
“인간의 삶은 끝났으니까.”
라는 대답이 당연해 보인다. 손톱 끝으로 바이탈 그래프를 긁듯이 따라간다. 손가락이 지나친 자리에 뿌연 자국이 잔뜩 났다. 나 정말 오락가락 하나본데. 유디트는 문득 슈테판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났다. 차츰 힘이 돌아오고 뇌 주름에 낀 노화 부산물 같은 안개가 걷혔다. 그는 일어나 앉고 싶었고, 곧 누구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고도 그렇게 할 수 있었다. 자전거도 탈 수 있을 것만 같은 기이한 자신감이 들었다. 옛날 기억을 더듬고 스스로 일어나 앉았던 것과 같게. 모가지를 쓰다듬다가 물잔으로 손을 뻗었다. 도와주려는 시늉 한번 없이 일마가 다가와 휠체어에 털썩 앉았다. 방석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완전히 잦아들고서야 침묵이 깨진다.
“선생님은?”
“곧.”
그래, 그러고도 운명의 신이 아니라 이거지. 아릿하고 하얀 웃음이 피어난다. 슈테판 파울루스의 얼굴과 목소리를 기억하기엔 나이를 너무 먹었지만 추억을 그리워하는 것은 인간의 속성이니까. 갈색의 고수머리를 한 서글서글한 남자는 요안이라는 악마 새끼의 아래 고아들을 보호하는 돔과도 같았는데 솔직히 말해서 애들이 뭘 제대로 알고 슈테판을 존경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슈테판 선생님은 그냥 항상 고아원에 있는 선생님이었다. 슈테판은 자주 웃고 저녁이 되면 들꽃을 꺾어 돌아왔다. 그럼 아이들은 와르르 웃으며 반지와 팔찌와 왕관을 만들어 엮으며 놀고 가끔 제일 좋거나 아니면 제일 못나서 간택받지 못한 작품을 그의 몸뚱어리에 걸어 두었다. 보통 슈테판은 몇 시간 동안 그걸 얹어 두고 있다가 햇빛에 다 바스러질 때까지 그걸 볕 잘 드는 창가에 보관했다. 그럼 오전 열 시께의 비스듬한 미광이 꽃잎에 내려앉아 생명을 낡게 하고 젊음을 앗아갔다.
“눈 덮인 산은 찾았어?”
“너보다는 빨리.”
“아르하는 언제 와?”
감각을 초월한 짐작이 콘크리트 벽을 허물고 건물과 지붕, 경적과 실랑이, 지축을 다 울리는 들개의 헛짖음, 시간은 물론 인과와 운명을 뛰어넘는다. 일마는 확신하지 못하는 어투로 짧게 “음.” 하더니. 아무것도 묻지 않은 손을 괜시리 옷에 닦아내다가 “너보다는 빨리.” 하고 휠체어에 더 깊게 앉으려고 들썩거리며 몸을 쑥 안으로 넣었다.
“그럼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어.”
“아파?”
“아니.”
“하나도?”
“둘, 아니… 셋 만큼 아파.”
일마는 곧장 유디트를 거짓말쟁이라고 매도했다. 말만 그랬다. 죽음이 뭔지 일마가 모르겠는가. 일마에겐 몇 년 전의 일이었다. 열두 살과 여든 노인의 몸은 다르겠지만 죽음에는 그런 것 따위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공평함이 있다. 그래서 죽음이 얼굴을 가리고 오는 거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디트는 반박하거나 남을 말로 기만하고 속일 때 가장 살아 있는 사람 같아서 그렇게 말했다. 전말은 이렇다. 그거야 뭐, 일마가 특별히 바보라서 그렇다기보다는, 말꼬투리 잡는 법도 사회생활 잘하려고 혀에 칼처럼 차고 다니고 응접실은 성전처럼 꾸며놓는 동네 할배 갑부에게도 생명에 끝이 있다는 사실은 그 어떤 사람도 쉽게 생각하지 않는 법이니까. 특히, 그 갑부한테 못돼먹은 구석이 있다면 말이지.
벌써 눈치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대화는 사실 가장 처음에 이루어졌다.
“엘프리드, 왜 그래?”
“기계 소리가 들려요.”
“기계?”
“청동 인형 같은 것.”
“그것에서 소리가 나니?”
“친구 데리러 가야 할 때는요.”
“항상?”
“아뇨. 할아버지나 할머니로 죽을 때만.”
“나중에 자세히 일러 주렴.”
“네.”
그리고 빛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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