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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0/일마

음악의 순간

by 곽제가 2021. 7. 22.

일마와 리산더와 슈테판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경구, 들어보지 못한 사람 일찍이 없겠지. 슈테판 파울루스에게는 차라리 직업병에 가까우며 일마를 앞에 두고서는 일과나 다름없다. “일마” 불렀으나 잘 돌아보지 않는 이름. 아이들은 모르겠으나 어른이라면 일마의 기묘한 태도를 쉬이 눈치채기 마련이었고 더불어 요안의 <특별 대우> 까지 목격한다면 아이든 어른이든 모르는 쪽이 멍텅구리다.

 

일마는 아이들 사이에 섞이려고 하지 않았다. 소위 ‘선생님’ 들에게도 마찬가지다. 퍽 까다로웠기에 조금이라도 신경에 거슬리면 찾아온다는 점만이 다행이었다. 일마는 슈테판을 조금쯤 경계하는 모양이다만 슈테판 자신은…, 뭐, 무슨 단어가 나오든 일마의 면이 안 서는 것은 마찬가지이므로 생략하겠다. 요새는 리산더와 붙어 다니는 듯했다. 평소라면 몰랐겠지만 둘이 이야기를 나누다 슈테판이 보이면 흩어지는 모습을 보니 무슨 작당이라도 하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슈테판은 일마에게 신경쓰는 일 많고도 할 일이 많다. 불온서적을 누가 가져가지는 않았나 가끔 방바닥을 뗀다. 금방이라도 끌려갈까봐 마음을 졸인다. 어린애가 드글드글하니 하루에 꼭 한번이라도 누가 다쳤다. 나날이 어린애 다루는 요령만 느는 중이다. 그들은 서로를 면밀히 돌보며 성질에 모난 구석도 별로 없었으나 어린애들을 모아 두면 언제나 사고가 나는 법. 해도 슈테판 파울루스는 이 문제덩어리들을 순수하게 사랑하지 않고서 견딜 수 없었다. 소매를 잡아 오는 마른 손을 어떻게 뿌리친단 말인가? 그리고 그 손을 뿌리치고 나서는 이 모지리 인생에 또 무엇이 남는단 말인가?

 

“선생님.”

 

불가해로다. 불가해로다. 슈테판 파울루스는 딱히 해준 것도 없는데 그네들의 보물을 한아름 안고 있게 되었다. 짐작하면서도 무엇이냐 물었더니 선물이라고 했다. 꽃이며 녹다 만 초콜릿에 먹는 것도 없으면서 제법 아껴온 옥수수에 빵. 고맙다고 어깨를 안아주자 발을 놀려 도망간다. 

 

오늘은 슈테판 파울루스의 생일이었다. 그에게도 태어난 날쯤은 있었다. 

 

일마도 그 행렬에 예외는 아니었다. 그를 부르는 소리가 있다.

 

“선생님.”

 

본래보다 가늘고 삭정이처럼 끊어지는 목소리를 들어 보아 듣고 멈추지 않으면 사달이 날 것이 분명하다. 듣지 못했다고 생각했는지 리산더가 끼어든다.

 

 

“슈테판 선생님.”

“응?”

 

창문에 누군지 못 알아보는 게 기적인 손자국이 난다. 갈색 그림자가 사라지고 리산더가 쭉 목을 뺐다.

 

“들어오세요.”

“지금 말이니?”

“혹시 바쁘세요?”

 

아하, 문도 없는데 들어오란다. 아주 깡패가 따로 없었다. 그는 망설이다 결국 돌아서 가는 길을 택했다. 슈테판이 식당으로 내려가자 반대편으로 내달리는 발들이 있었다. 그에게 얼굴을 보이기 싫은 듯 우다다 소리를 내며 달음박질하자 바닥을 차올리는 무게와 속도로 미루어 누군지 이름을 집을 수 있을 정도였다. 길지 않은 복도가 끝나고 손잡이를 당기려 하자 외려 혼자 열린다. 문 뒤로 리산더가 과장된 인사를 했다. 짐짓 우아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목소리는 참으로 우렁차고. 일마가 잠깐 뒤를 돌아보았다가 언제나 그렇듯 미련 없이 시선을 거두었다.

 

“앉을 자리는 많아요.”

 

그야 식당이니까 그렇지. 리산더가 작은 의자를 끌어다 준다. 슈테판은 일마가 오랫동안 건반을 공들여 닦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미 먼지 한 톨 없는데도 일마는 계속해서 헝겊을 털고 건반을 어루만졌다. 이가 많이 빠져 싸구려 같은 음을 내는데도 진지한 얼굴이다. 일마는 제법 피아노를 잘쳤다. 고아원으로 보내지기 전에도 오랫동안 배운 듯했다. 그리고 이곳 구석 고아원에는 아가씨처럼 자란 여자아이가 할 일이라곤 피아노뿐. 이곳에 무슨 대단한 책이 있으랴. 아님 세계의 원리를 꿰뚫을 훌륭한 선생님이 있으랴. 리산더는 전전긍긍해하다 일마에게 몹시 작게 속삭였다. 다 들렸다. 

 

“일마, 왜 시작 안 해? 혹시 까먹었어? 그럼 내가…”

“조용해, 리산더.”

 

아, 그날따라 날씨가 맑았다. 투명한 공기를 타고 신음처럼 꺽꺽거리는 못난 음이 세상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현을 끊어먹은 건반을 모두 한 개씩 두드려본 일마가 두 손을 모두 올린다. 리산더는 습관처럼 자리에 앉으려다 잽싸게 일어났다. 춤을 춰야지, 춤을. 눈만 봐도 무슨 말이 오가는지 알 것만 같아 웃는다. 그 소리에 세모눈을 하는 일마는 음악가다. 음악가는 입으로 말하지 않는다. 음악가는 음악으로도 충분하다. 일마에게는 냉혹한 리듬과 애상한 손짓, 환상처럼 엄격한 음정 중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으나 단 하나만큼은 명확하다. 

 

일마는 자신을 위해 연주하지 않았다. 

 

장난처럼 미끄러지는 음으로 일마가 발을 들썩거린다. 뒤이어 소년의 딱딱한 구둣발이 강약을 주며 캉캉 때리는 소리를 낸다. 엇박으로 움직이는 손에 따라 이지러지는 사람의 목소리처럼 음이 도약하거나 끊어질 듯 늘어진다. 경쾌한 음이었다. 리산더가 작게 숨을 들이키더니 고운 목소리를 냈다.

 

“온 세상이 생일이에요,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요? 내가 웃고 다들 웃고 바보 같은 일로 뭘 하는지!”

 

일마가 뒤따른다. 슈테판이 턱을 괴고 있다 자세를 살짝 고친다. 두 목소리와 이 빠진 피아노, 원맨쇼처럼 휘적거리는 멋진 춤이 맞물려 한 소절의 음악이 된다. 그는 생각한다. 다음에는 이 노래를 꼭 불러줘야겠다. 꽃 몇 송이를 챙겨서 나눠주고 나면 알아서 동그랗게 모일 테다. 천천히 손뼉을 치다 속도를 높이자. 그럼 누구든 신나 볼을 붉히겠지. 

 

일몰이 찾아들려 한다. 붉은 광선이 세 개의 얼굴을 덮었다. 곧 식사 시간이 다가오고 수십 개의 발이 찾아들기 전 엉뚱하고 사랑스러운 지금, 제목을 단 하나 붙이자면, 순간이었다. 음악의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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