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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0/일마

폭우

by 곽제가 2021. 7. 22.

일마와 구스타보

 


 

하늘이 쪼개지는 굉음이 난다. 기록적인 폭우였다. 고개를 꺾어 올려다보니 구름이 없어지는 모양이 보일 정도였다. 눈알의 뒤쪽으로 물이 흘러 들어간다. 아프진 않다. 아프면 뭐 어떤가. 요즈음 들어 엘프리드는 밤을 보내는 법을 잊은 지 오래였다. 무한한 (반쯤이라도) 삶이란 (이게 삶이라면) 그렇다. 스러지고 고장나도 얼마든지 일으켜 세울 수 있는 강인한 육신은 제대로 된 실체도 없으면서 잠을 자든 말든 식사를 거르든 쑤셔 넣든 순전한 본인의 버릇으로만 작동했다.

 

엘프리드는 밤을 지새우는 법을 체득한 지 오래다.

 

척척한 손이 바깥에서 창틀을 만지작거리노라면 듣기 싫은 소리가 난다. 몇 번이고 쇠고리가 맞물리지 않는 소리를 참아야 했고 어쨌든 조금의 틈으로 엘프리드가 들어올 수 있었다. 그녀는 창문을 잠가 놓아도 알아서 들어오는 능동적인 피터팬이다. 연락이나 선물도 없이 왜 자신을 위해 창문을 열어 놓지 않았느냐고 징징거리는 P 군과는 질적으로 다른 요정이기 때문이다. 그뿐인가? P 군에게는 없는 총, 여분의 손가락 하나도 더 있으며, 음악적 소양과 금은보화도 충분하다. 그러니까 엘프리드를 견뎌 주길 바란다. 그럼 언젠가는 복이 온다. 완전히 들어온 엘프리드가 동그랗게 몸을 말더니 부풀어 인간의 형상이 되고 검은 비늘을 찢고 나오듯 온몸을 반으로 가른 실금을 따라 살과 옷감이 그리고 머리카락이 돋아났다. 그리고 3초 전 무시무시한 변신을 해 놓고 코트를 집어 던졌다. 

 

‘이 소리에 깨지는 않겠지’

 

라고 엘프리드가 생각한다. 창문의 개수를 헤아리기도 어려운 광활한 공간, 빈자리를 채울 가구가 부족한 이 방에는 괜한 작은 소리도 크게 들리곤 했다. 하도 깜깜한 장소라 팔다리에 가구가 채이는 소리가 몇 번 난다. 곧 가느다란 몸이 굽어들고 척척하게 젖은 흔들의자가 앞뒤로 까닥였다. 구스타보는 일어날 기미가 없고 엘프리드는 시간이 많았다. 그는 자는 것처럼 보였다. 자꾸 깨려고 하지만 번갯불이 꺼질 때마다 도로 잠들었다. 빗소리에 한숨 소리가 섞였다. 온몸을 감싸는 부드러운 천에서 먼지구덩이 냄새가 풍풍…… 의자 기울어지는 소리를 천둥이 가렸다. 이윽고 가까운 곳에서 벼락. 사위가 밝아진다. 일마가 가벼운 목재의 마찰음을 즐기며 말했다. 

 

 

“너 이젠 천둥 소리가 하나도 싫지 않은가 보구나.”

 

 

번쩍! 가느다란 눈이 사르르 열린다. 네 개의 녹안이 허공에서 부딪히려다 길을 잃었다. 그는 이제 일마의 이름은 부를 수 있어도 모습은 볼 수 없다. 몰래 촛불을 들고 온대도 비치지 않을 것이고 혹여 그러다 촛농을 어깨에 부어도 비명 한 번 들리지 않겠지. 서운하다거나 슬프지는 않다. 이런 이야기에서 으레 떠난 아이가 어른이 되는 것과 다르게 이 이야기에서는 남겨진 아이들이 먼저 어른이 되었다. 

 

 

“세상 모르게 자는 걸 보니.”

 

 

덧붙이는 말에 잇달아 굉음이 따른다. 웃음기는 없지만 농담이라고 치부해 주면 좋겠다. 창밖으로 시선을 옮긴다. 손깍지를 단단하게 낀다. 안 그래도 폭우가 거슬리려던 참이다. 

 

‘이제 그만.’

 

그 메마른 목소리는 속삭임이었던가? 입술이 다물려 매초 340m를 달려오는 소음이 창문과 부딪히자 축음기처럼 맥없이 늘어지더니 끊어지고야 만다. 쉿쉿거리는 바람이 흩어지고 굵은 빗방울과 인간의 숨만이 기기괴괴한 적막을 채웠다. 놀라운가? 놀랄 것도 없다. 이제 이런 묘기쯤은 쉽게 부린다. 방안을 침묵으로 채운 엘프리드는 이제 의자 흔들거리는 소리도 싫어서 끽끽거리는 높은 음도 퍼다가 방 밖으로 내쳤다. 비유가 희한하다고 생각하겠지만 놀랍게도 엘프리드가 실제로 하는 일과 가장 가까운 표현이다. 그런데 행동력이 무상하게 구스타보는 더 깨려고 한다. 그럼 불도 꺼주면 되지. 커튼 술이 바닥으로 제 몸을 던진다. 사르르 커튼이 부드럽게 술렁이며 풀어진다. 다시 의자가 흔들렸다. 쌀쌀한 여름이라 구스타보에게 이불을 좀 잘 덮어줄 수 있었겠으나 딱히 그렇게는 하지 않았다. 

 

 

“나를 두고 혼자 어른이 되었으니,”

 

 

대신 손가락으로 악몽을 눌러 죽이기에 여념이 없다. 이마가 눌릴 때마다 구스타보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왜 엄살이지? 느껴지지도 않을 거면서.

 

 

“잘난 맛 하나쯤은 있어야겠지.”

 

 

다시 한번 무저갱 같은 고요가 찾아온다. 엘프리드는 그것을 계속 두기로 했다. 그 자리를 떠나겠다 결심하자 눈길이 따라왔고 그것을 제지하거나 아는 체는 말기로 했다. 그건 아주 쉬운 일이니까. 그리고 일마는 쉬운 일을 좋아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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