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퇴색하고 추억은 돌아온다. 서른 살의 기디온은 이 문장을 몇 번이고 고쳐 썼다. 더이상 글이 이어지지 않았으므로 문장 하나로 며칠을 생각할 수 있었다. 찌그러진 종이가 새것처럼 펴지게 된다면, 이미 먹어치운 빵이 더운 훈기를 뿜게 된다면, 녹은 케이크를 테이프로 고칠 수 있게 된다면 실패한 문장 하나 정도야 쉽게 잊어버릴 수 있을 텐데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고 파도 소리는 바다에 가지 않으면 들을 수 없다. 그리고 일기를 이어 쓰기에는 너무 많은 날이 흐른 이후.
기디온은 그 문장을 결국 버리지 않고 다음 문장을 쓸 날이 올 때까지 노트의 맨 앞장에 포개어 놓기로 결정한다.
사랑이 돌아오고 추억은 퇴색할 때까지
자주 쓰게 되는 단어가 있다. 버릇을 고치고 싶어서 남은 시간이 되면 필사를 하거나 일기를 적었다. 오랫동안 쓴 일기를 잃어버리고 나서 한동안은 새 일기장을 만들지 않았지만 소일거리를 만들고 또 만들어도 한번 스마트폰에 익숙해진 뇌는 끊임없이 지루함을 호소했다. 일기를 쓰고 읽다 보면 재미있는 점이 많다. 이 때에 이런 생각을 했구나. 이런 일이 있었구나. 이 단어를 많이 쓰는구나. 그는 일기를 자주 쓰지 않고 어떤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만 썼기 때문에 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격변의 연속이다. 예전 일기를 다시 찾아오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그것은 플랑크톤 한 마리도 살아남지 못하는 차가운 얼음 속에서 냉기와 힘겨루기를 하고 있을 것이다. 먼저 부서지는 쪽이 승자이다. 아니면 누군가가 찾아 장작으로 써버렸을 수도 있겠다. 아쉬움과는 별개로 차라리 다행이다. 젊은 시절의 일기는 펼치기 부끄러운 구석이 있다. 당시는 한없이 진지하고 나중에는 전혀 그렇지 않다. 부모님이 일기를 책장 맨 위에 올려두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요지는 기디온이 아직도 일기를 열심히 썼다는 것이다.
물론 쉘터를 나오면서 일기를 가져온 것은 아니다. 기디온은 여러분 상상의 정확히 반대로 행동했다. 그는 일기를 모조리 태웠다. 장작도 부족한 때에 잘된 일이다. 캠프 파이어의 불이 빠르게 종이를 살라먹었다.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면 누군가 그의 책을 뒤지게 되겠지. 치부는 적지 않았지만 미숙하고 감정이 흘러넘치는 글을 보여준다는 것만큼 끔찍한 일이 또 있을까. 만의 하나라도 남기고 싶지 않다. 그는 버스에 앉아 미처 이어 쓰지 못한 문장을 몇 개 생각한다. 그리고 오늘 시작할 법한 문장을 떠올린다.
사람들이 다쳤다.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다.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닌’ 이만큼 공허한 말이 또 어디 있을까. 이 중 누구도 이 사태를 ‘예상하지 못한’ 사람은 없다. 알면서도 눈물짓는 것은 인간의 특성이다. 처음으로 친구가 죽었던 날의 기디온은 이들과 달랐나? 아니. 사실 사람은 얼마나 나이를 먹든 간에 죽음을 눈앞에서 보기 전까진 누구나 영생한다고 믿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오늘 시체를 보았고, 들었다. 오늘은 강도였지만 내일은 선량한 사람일 수 있다. 그 사람들과 우리는 싸울 수 있을까?
어둠을 이겨내기 위한 가장 쉬운 방법은 불을 켜는 것이 아니다. 불을 켜는 사람은 혁명자다. 피는 붉고 제비꽃이 푸르다는 걸 아는 사람만이 빛을 찾으러 갈 수 있다. 어둠 속을 걸어가며 마음 속에 색채를 품을 수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유리 등갓에 손가락이 부딪히자마자 공기보다 차가운 그것을 벗겨 성냥을 갖다댈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기디온은 그런 종류의 사람이 되지 못했다. 가장 쉬운 방법을 찾아내기로 했다. 등을 돌리는 것이다. 등잔 밑을 구태여 바라보지 않는 것이다. 자신을 선으로 규정하면 결국 미쳐버리고 만다. 비를 맞지 않으려고 우산도 없이 그 속을 걸어가는 격이다. 그 비는 소매만 적시고 끝나지 않는다. 대신 옷깃을 파고들고 마를 때까지 체온을 뺏어가고 나서야 끝난다.
허구의 피냄새가 가상의 비를 매질로 빠르게 콧속으로 기어들어왔다. 차갑지도 축축하지도 않다. 기디온이 몸을 옹송그렸다. 그는 우산을 쓰기로 했다. 그럼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럼 그대로 걸어나가면 된다. 마땅한 지붕이 보일 때까지. 닫을 만한 창문이 생길 때까지. 작게 씨근대던 그가 손수건을 말아쥐었다. 미치지 않으려면 누구에게나 편법이 필요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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