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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0/기디온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이야기

by 곽제가 2021. 5. 22.

기디온 하퍼 블랙허스트의 인생

 

땅거미가 내려앉는다. 기디온에게 기댄 신시아의 왼뺨은 팔의 안쪽처럼 부드러웠다. 창문보다 차갑고 비만큼 축축했다. 기디온은 모든 것을 내주고 뺨 한 편만을 얻었지만 어릴 적만큼 억울하지는 않았다. 너무 가까워 서로의 날숨이 들숨이 되고 있었기에 신시아가 그의 살갗 아래에 도사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런 상상에서조차 그는 사랑을 느꼈다. 둘을 덮은 담요를 신시아의 어깨까지 끌어올렸다. 신시아는 그 담요를 다시 기디온의 어깨까지 올려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눈만 겨우 밖으로 내놓게 되었는데도 다시 내리려 하지 않았다. 지독히도 슬픈 영화를 견디지 못해 돌린 채널에서는 분위기를 깨는 ‘평면 우주’에 대한 다큐멘터리의 클라이맥스에 다다르고 있었던가. 아주 좁은 면적만이 닿고도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사랑이라 호명한 관계는 매 순간이 하루가 처음보다 빛바랜 언젠가까지 아무리 하찮고 같잖아도 영원하기를 바랄 만큼 아름다웠는데 차마 이름 붙이지 못한 수많은 애정은 뭐라고 불러야 그토록 아름답게 기억할 수 있을까. 

 

 

 

그것에 이름을 붙이려 한 것이 잘못이라는 걸 일찍 깨달았어야 했는데

 

 

 

머리카락을 비껴가는 더운 바람을 누가 헤아릴까? 어릴 적 기디온은 바람이 아닌 사람도 비슷하게 취급했다. 사람들은 누구와도 친하게 지내려 하지 않는 기디온을 ‘저 개자식, 얼굴값 한다’며 실컷 씹었는데 그는 결코 개의치 않았다. 아니면 그런 것처럼 굴었다. 겉으로 보기에 그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이요 세상을 왕따시키는 독사같은 인간이었다. 그는 또래 사이에서만 그런다고 생각했겠지만 어른들은 아이들을 손바닥 내려다보듯 보이지 않는 금까지 쉽게 읽어내린다. 착하지만 친구는 없는 아이. 음. 그런 그가 친구라고 부를 만한 관계를 구축한 것은 이 사실을 알아차리면서 부터였다. 하자 있다고 여겨지는 건 죽기보다 싫었다. 그때부터 그는 선을 좀 아래에 긋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년을 살았더니 학생회장이 됐다! 하! 세상은 역시 호락호락하다.

 

아니 기디온 블랙허스트가 이따위 인간이었단 말인가? 그는 언제 변하게 될까? 뭐 기디온을 이해하려면 성장배경을 먼저 알아야겠지. 읽기 싫으면 이쯤에서 넘겨도 된다. 원래 없는 이야기인 척 하겠다. 한 문단만 넘기면 된다. 

 

 

그는 보스턴에서 2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살짝 인간폐기물이었고 어머니는 그에게 진절머리가 나 이혼 후 두 아들을 짐짝처럼 들고 밀워키로 떠난다. 안타까워하지 않아도 좋다. 미국인들이 걸핏하면 하는 게 이혼이다. 2000년도에는 미국인 무작위 천 명당 네 명이 이혼을 했다고 한다. 그럼 성인 중에선? 결혼했던 사람들 중에선? 말하지 않기로 하지. 그가 슬퍼진다. 어쨌든 기디온은 놀랍게도 그 외모가 살짝 역변한 케이스였다. 어렸을 때 더 아름다웠다는 소리다. 그는 어려서부터 잘생겼다는 소리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서 꼴에 오만함을 장착했다. 그 결과로 또래를 무시했다. 사실 그는 오만할 만큼 대단한 소년이 아니었다. 그래서 오만함에 걸맞는 지성을 갖추기로 한다. 그렇지만 모든 일이 생각대로만 되었다면 왜 사람들이 태운 고기를 칼로 잘라내겠는가? 그는 약간은 똑똑했지만 충분히 영리하지는 않았다. 시골에서야 좀 우등생이었지 도시 생활은 녹록치 않았다. 그래서 그는 또래를 무시하는 것을 멈추고 친구를 만들게 된다. 성격이 좀 이상한 걸 빼면 그는 착한 아이였다. 여태 뒷말해놓고 착하다고 하냐 따지지 말길 바란다. 이제와서 딴말하는 건 기디온이 무서워서가 딱히 아니다. 그리고 그 이전에도 친구는 있었다! 단 두 명이지만. 죽지 않은 신시아와 죽은 길버트.

 

한 문단이 끝났다. 이쯤하여 그의 지나간 친구들 이야기를 간략하게 해보려 한다. 지마는 그가 잘해줄 걸 후회하는 친구들이 모두 죽었을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지만 그렇지는 않다. 몇 명은 살아 있다. 기디온은 워낙에 사람을 많이 사귀고 다녔기에 확률의 신이 그를 미워하지 않는다면 몇 명 정도는 살아 있어야 한다. 기디온은 자라서 어렸을 때보다 훨씬 사람이 되었다. 그는 행동은 살짝 불량해도 불의를 (웬만하면) 참지 않고 (가능하면) 선한 행동을 하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사귄 친구들은 모두 착했다. 그가 변화한 경위는 이렇다.

 

각개 동아리 부장들이. 그와 야구를 하던 소년들로. 심화수학을 같이 듣던 책상 메이트는. 하고 싶은 공부를 따라 수학과에 진학하자 인생에 급작스레 나타났던 수 명의 엘리트 너드 찌끄레기들까지. 공부하려고 대마 피우던 제정신 아닌 수석 또한. 고아원 봉사를 다니던 동기로부터. 신시아가? (신시아에 관해서는 할 말이 매우 많지만 기디온이 알리기를 저어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학생 시절을 통째로 신시아 한번 이겨먹으려고 고군분투하는 데 바쳤으며 신시아는 날개 달린 새처럼 그의 성적을 웃돌았다. 그렇게 아득바득 이나 갈고 있는데 신시아가 기디온을 좋아한다니! 차라리 천지가 개벽하지!) 그를 연극부에 끌어들인 인간 엔돌핀들은. 야, 너 되게 잘 가르치는데? 나랑 PRAXIS(교사 자격 시험) 치자. 진심이냐? 당연하지. 그를 유럽에 데려간 동기도. 산에 목숨 걸던 미친 인간들. 길버트, 나랑 등산할래? 뭐? 나랑 산을 타? 내가 왜 등산을 해! 내가 하니까. 길버트 역시.

 

기디온에게 불어와 그의 어느 한 부분을 바꿔놓고 사라졌다.

사람들과 구르고 부딪히고 깨지고 소리지르고 한계를 깨닫고 도망치고 돌아왔다가 된통 당하며 기디온은 점차 인간이 되어갔다. 다시 한 번 상기하자면 그는 한번도 그들에게 제대로 친절해본 적이 없었다. 말은 퉁명스럽고 행동도 살갑지 않았다. 사람들은 왜 그를 그렇게 좋아했을까? 왜 아무도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않았을까? 왜 대가 없이 우정을 주었을까? 그리고 친구들이 죽어서야 후회했다. 눈앞에서 쓰러지고 전화를 받지 않고 메신저 마지막 접속이 세 달 전이 되어서야 후회했다.

 

 

그 헤아릴 길 없이 무수한 감정이 모두 사랑의 한 갈래였다는 걸

 일찍 깨달았어야 했는데

 

 

재앙이 벌어졌다. 기디온은 또 너무 많은 죽음을 보았다. 그는 점차 겸손해지고 말이 없어졌다. 깊은 병이 그의 안에 도사리고 있었다. 그 뒤는 여러분들도 아는 이야기다. 그는 역량의 몇 배는 후회하고 절망하고 고통스러워했다. 항상 처음처럼 슬퍼했다면 벌써 눈물로 흩어지고 말았겠지. 그는 아이들에게 ‘친구들에게 친절하라’ 고 가르쳤다. 속으로 흐르는 눈물을 삼켰다. 그것은 내부를 타고 흘러 나가지 않고 종유석처럼 자라났다. 

 

그애들이 모두 기디온의 가르침을 제대로 받들었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친구를 있는 대로 많이 사귀고 호의를 보이는 사람 모두에게 같은 호의를 되돌려 줘야 한다. 강하고 얼어붙지 않는 마음을 가지며 양심과 인간성이 없는 것, 좋다 이거다. 저주에 안 걸리면 이득 아닌가? 그렇지만 기디온은 언제나 말해왔고 지금도 말하고 싶었다.

 

 

그것은 사랑이 정말로 이루는 기적에 비한다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사랑은 받는 자를 치유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들을 약하게 만든다. 사랑으로 강해지는 사람은 사랑하는 자 뿐이다. 사교주는 사랑받을 줄만 알았지 사랑할 줄 몰랐다. 그런 사람들은 하느님과 베드로 앞에 보내져서도 ‘씨발, 제가 뭘요’ 이 소리나 하다가 지옥에 처박히기 십상이다. 또 죽기 일보 직전인 기디온이 다시 일어날 수 있을까? 희망사항을 먼저 말해보자면 그러고 싶다.

 

버드의 백화점에 공짜로 입점하고 싶다. 그럼 동상 뒤에서 사진을 찍을 수 있을 것이다. 리비아가 꽃을 심는 걸 도와줘야하고. 아주 될성부른 노인학대범이라니까. 왜 굳이 늙은 미래의 기디온에게 일을 시키려고 하지? 제인이 수영을 배우는 순간도 구경해야 한다. 그는 한가롭게 배 위에 앉아 있다. 린든이 67세가 될 때까지 살아있어야 한다.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한 수명이다. 키멘이 봄을 포기하자고 하면 이유는 들어줄 생각이다. 노아가 창! 밖! 에서 수업을 지켜볼 때 지목하고 발표도 시켜주지 않으면 서운하다. 에일에게 ‘한여름 밤의 꿈’ 을 빌려줘서 독후감도 받아내야지. 리카온과 럼주를 따고, 이사야를 비웃고(이유야 만들면 된다), 지마와 음악을 들어야지. 닉시의 말대로 영생하고 제프의 유언따라 봄을 찾으러 가다 보면 미아를 비롯한 잃어버린 사람들이 있는 곳에 도착해 있을까? 그때의 기디온은 후회가 없을까? 그럼 그때가 될 때까지 기다리자. 사십 년은 걸리겠지만 그 정도의 참을성은 있겠지. 당신들을 믿는다. 기디온이. 

 

 

 

당신들은 밤과 정적과 불멸하는 휴식에서 기다리시오

나는 바람에 떠가다 그곳으로 갈테니

너무 오래 기다리지 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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