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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1/리퀘스트

몸집이 엉기는 시간

by 곽제가 2021. 5. 22.

연향 님의 리퀘스트입니다. 

 

인간들은 인간에 대해 고찰하기를 즐겨했다. 인간은 무엇일까? 물론 세상엔 너무 많은 사람들이 복작거려서 배우는 게 재능인 학자들도(놀랍게도 가르치는 데엔 재능이 없다고 알려졌다) 답을 내리기엔 천 년은 멀었다고들 한다. 라고 천 년 전부터 쭉 일컬어왔지. 어쨌든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정의내리는 걸 좋아하는 바람에 여기엔 수많은 바리에이션이 있다. 비록 정답은 아닐지라도. 여기 로건은 사람을 망각의 동물이라고 생각했다. 성은 없다. 이름이 분명 길었는데 잊어버렸다. 흔한 성도 아니었다. 로건 스미스, 이런 발에 채는 이름이었으면 기억했겠지.

 

그의 직업은 황제이며 취미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아무 데도 쓰지 않고 낭비하기다. 그는 너무나도 고귀해서 태어나는 순간 아무도 입을 벙긋하지 못했다. 인간을 잡아먹는 데 혈안이 된 괴물로부터 백성들을 지키는 결계의 힘은 누구도 거역할 수 없도록 강력하여 뭇 사람들이 이능을 쓰지 않을 때의 금안을 기억하지도 못하는 정도였고, 허물과 잘잘못을 내보이더라도 덮어놓고 두려워하는 자만 가득하여 로건은 사람을 얼굴보다는 정수리로 구별하길 즐겨했다. 그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믿지 않았다. 기억하지 않았다. 선대의 누구는 군림하는 게 그렇게 재미있어서 폭군이었다는데 로건은 사람들이 자기 발치에 엎드려서 우좌우로 굴러가는 게 싱겁기만 해서 황제 따위 안 하고 싶었다. 그래서 왕후장상의 씨는 따로 없어도 황제의 재능은 따로 있나 보다. 

 

차라리 에단과 손잡고 하하호호 유람이나 하면 신날 텐데, 그는 아마 지금쯤 혀끝보다 예리하게 벼린 검을 들고 로건의 목을 찌르러 오는 부하들과 함께 가도를 걷고 있을 것이다. 아, 피냄새. 널부러진 시체를 치울래도 곁에 남아 있는 시종이 하나 없다. 다들 그렇게 죽고 싶었나? 왜 그러지? 그의 힘을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용도가 용도다보니 그만 잊어버렸나 보다. 이래서 사람이 망각의 동물이라는 거다. 숟가락을 들어도 로건이 들면 목이 날아갈텐데 왜 한순간의 실수로 개죽음을 당한단 말인가. 이래서는 에단을 맞이할 수 없지 않아. 걔가 얼마나 깔끔을 떠는데. 이 문으로 들어오는 폼이 얼마나 수려하여 빛마저도 색을 바래 부옇게 얼굴이 드러났던가. 가늘게 금이 간 흉마저도 흠이 아니다. 로건은 에단이 그때 얼마나 놀랐을지를 생각한다. 저렇게 눈이 다치면 핏물 때문에 눈을 뜨지도 못했을 테지. 보이는지 안 보이는지 알 수 없어 두려웠을 게다. 

 

그는 꼭 로건의 상상대로 그 커다란 문을 열고 들어온다. 병기 부딪히는 소리, 들리지는 않지만 에단이 이빨을 깨물었다. 창문의 유리에 꺾여 들어오는 넓은 노을빛에 창검이 반사되었다. 로건은 그를 맞이하기 위해 잠시 일어섰다. 애석하게도 에단이 그를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에단은 팔이 갈대처럼 으스러져 종잇장처럼 접힌 어떤 시체에 눈길을 두고 있었다. 아는 얼굴인 모양이었다. 그래, 그라면 이런 상황을 견디기 어렵겠지? 신분과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뒤엉켜 죽은 병사와 기사들의 산이 이곳 화려하고 아름다운 홀에 쌓여 있다니. 그렇지만 로건도 사람이라 에단이 자길 더 생각하지 않아서 서운하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 나라 황제를 죽이러 몰려왔는데 왜 너는 날 걱정하지도 않아? 왜 그런 눈으로 봐? 너는 저자들과 똑같이,

 

“나를 죽이러 왔느냐?”

 

라고 하자 에단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왜?”

 

응달처럼 검은 머리카락이 사부작사부작 소리를 내는 착각이 든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래. 네 얄팍한 동정은 겨우 이만큼이었다. 불경한 자로다. 점차 뻐근해지는 가슴을 편다. 심드렁한 얼굴을 꾸며내어 에단을 불렀다. 평온한 얼굴만 보면 이 비린내가 넘실거리는 계단이 식탁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그럼 네 의무를 다해라.”

 

에단이 설핏 입을 작게 벌렸다. 분명 무언가 말하려고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로건은 거기서 사무치고 절절하게 가여운 슬픔을 읽었다. 마르는 입술, 경직된 안면, 둘 곳을 찾지 못하고 애써 로건을 마주하려는 눈길. 거기서는 시린 바람에 손톱이라도 찢어진 사람처럼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가 말할 수 있었다면, 진실로 말하고자 했다면 ‘왜 그런 말을 하느냐’ 고 했을까? 그렇지만 그런 게 모두 무슨 소용인가? 결국 그가 로건을 죽이러 왔는데. 잘 보아라. 이 세상 동화들은 모두 거짓이다. 돈을 낭비하지 말며 사랑하는 사람들을 충실히 사랑하라. 이런 동화가 세상에 참 많지. 그는 황제인데도 동전 한닢은 커녕 잡을 손가락 하나 남지 않았도다.

 

“왜 그런 표정을 하지?”

“......”

“나를 죽이는 방법을 아는 건 너 뿐이잖느냐.”

 

그렇지? 라고 말하듯 로건이 고개를 기울였다. 기대하는 대답이 있다. 싫다고 말해주면 안될까. 지금이라도 잘못했다며 조금 울고 나와 함께 바깥을 걸으면 네 명예는 실추되다 못해 진창으로 처박히겠지? 내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죽였으니까. 자기 이념을 위해 등잔 같은 목숨을 내놓은 모든 사람들은 여기 시체들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악행도 불사하리라. 그래도 지금 풍경이 아주 좋다. 하늘이 보랏빛으로 물들고 정원의 새소리가 귀를 채우지.

 

“제가 전하를 죽일 수 있을 리가 없잖습니까.”

 

역시 그런 게야?

 

밑 빠진 독에 고양감이 차올라 끝내는 넘치고 만다. 에단이 고개를 꺾지 않으면 올려다보기 어려운 황좌를 향해 걸음을 옮긴다. 한쪽 무릎을 꿇었고, 떠가는 먼지와 함께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빛났다. 그가 로건의 손톱 끝에 입을 맞추었지만 축축하지 않다. 이것 봐라. 에단. 나는 너를 죽이지 못해. 그렇다고 네가 나를 죽일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나. 우리의 운명은 이렇듯 도돌이표야. 에단의 뺨을 두세 번 쓰다듬은 로건은 자신이 위선적이라는 사실을 순순히 인정했다. 그는 에단을 대할 때는 좋은 사람인 척하는 버릇이 들었다. 에단은 로건에게 신하된 마음으로 복종하는지는 모르지만 로건은 귀족 모가지로 공을 차고 놀아도 에단의 뜻이라면 거역할 마음이 없다. 사람의 마음은 변한다. 괜찮다고 말하면서도 뒤에서는 작당 모의를 한다. 배신한다. 감언이설을 하고 돌아서면 얼굴이 바뀐다. 그러니 로건은 ‘지금’ 을 실컷 기뻐하기로 했다.

 

난 네게 죽어줄 수도 있었어. 에단. 선택하지 않는 건 너야. 네 잘못이야. 그것만 알아두어라. 

 

시간이 영원의 일부같이 흐른다. 로건은 에단의 동그란 뒤통수를 안은 채 머리카락을 손으로 몇 번이고 빗었다. 이렇게 하루가 지나간다. 보라, 네가 없는 나는 이렇게나 따분하게 산다. 그러니 이만 같이 저녁을 들고 바깥을 걷자. 나는 그 정도면 돼. 차가운 뺨이 로건의 무릎을 덮는다. 부드럽고 눈물로 축축한 온도가 오히려 로건에게 힘을 불어넣었다. 

 

“나가자꾸나.”

 

뚜렷한 음성이 에단의 머리로 스며들었다. 에단은 듣고서도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해가 지면 하늘이 붉어진다. 그러니 눈을 감으면 뺨이 붉어질 수도 있겠지. 자. 이것은 전혀 부끄러운 게 아니야. 치부가 아니야. 만일 남들이 우리를 손가락질한다면 너만은 빗겨가도록 하마. 로건이 천천히 목을 숙였다. 그의 어깨에 눈가가 닿을 때까지. 그래서 서로의 몸집이 엉길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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