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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1/리퀘스트

아라비안 나이트

by 곽제가 2021. 7. 22.

00

 

내가 눈을 뜨면 너는 사라져버리겠지. 그런다고 고장 난 게 고쳐지지는 않아요. 네가 있는 곳에서 죽고 싶어. 그러니 단 한 순간도 떠날 수 없었다.

 

신부님도 사제라면 신이 있겠지만, 나의 신은 하나예요. 그는 마음대로 되는 법이 없죠. 주는 것 없이 바라요. 자살자들은 숲이 되는데 나 같은 사람은 어디로 가게 될까요? 대답하세요, 베르길리우스. 악마보다 빠르게 달리세요.

 

 


01

 

한 번 태어난 것이 사라지지 않으면 사람들은 그것을 괴물이라고 한다. 그런데 죽지 않는 괴물이 사람을 죽이면 그들은 괴물을 이르러 예언자라 이르고 예언자가 사람을 천 명 죽이면 예언자가 신이 된다. 자, 잘 들어. 이것은 신이 될 뻔한 괴물의 유감 어린 이야기니까. 단 주의사항이 있어. 함부로 취해서는 안 돼. 명민한 머리를 일부러 굴리려고도 하지 마. 정신 똑바로 차리다간 부러지기 십상이야. 한 귀로 들어오면 한 귀로 흘려라. 파란 피가 흐르는 괴물에게 꼬리를 밟히기 전에.

 


02

 

너스레를 떨려면 얼마나 많은 근육이 필요한지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왜 굳이 이 말을 했는지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벌써 알아차렸겠지? 이사야는 여기 속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세상만사가 피곤하다 못해 혐오스러웠으며 삶의 즐거움이라고는 오늘도 돌쩌귀가 날아가도록 대문을 박차며 들어오는 커다란 개 한 마리뿐이었다. 그 개는 언제나 발 위로 동그랗게 꼬리를 올리고 이사야가 한 번 이마를 톡 건드려 줄때까지 기다렸는데, 원하는 대로 예쁨을 받고 나면 아무 곳에나 코를 박고 돌아다니다 ‘흠. 오늘은 아무 일 없군.’ 하고 나가기 시작한 지가 벌써 반 년에 이르렀다. 이사야는 그럴 때마다 개가 집 안을 돌아다니다가 혹시 미하엘의 몸 위로 올라가지 않게 신경 썼다. 정작 올라갈 개는 신경도 쓰지 않았건만.

 

미하엘은 숨소리도 없이 잠들어 있다. 만지면 따뜻하고, 뒤집으면 몇 시간이고 이불에 달라붙어 있던 살갗이 습하다. 기온보다 서늘한 몸이 느리게나마 3초에 한 번씩 맥동했다. 그래서 이사야는 가끔 아침이나 저녁이 되면 그의 손목에 손가락 두 개를 얹고 열 번을 세어서야 일어났다. 가끔 평소보다 느리게 뛰는 날에는 열 번을 더 헤아렸다. 그러기가 이십 년이 지났다. 

 

이사야는 그간 이십 년에 비해 한 사나흘쯤은 늙었을까, 이제 옛날의 누구도 다시 만날 수 없는 몸이 되었다. 옛 친구가 그의 주소를 잃어버리고 사랑하던 동료들도 얼굴과 목소리가 가물가물하다. 재앙이 터진 지 너무 오래라 그의 기록된 신상이 데이터베이스와 함께 소멸되었다는 점만이 다행이다. 그는 이제 약간 다른 이름과 여전히 그림 같은 미소로 세상을 살아갔다. 미하엘을 데리고 방랑하기는 조금 어렵지만 아프다고 둘러대면 어깨를 으쓱거리며 떠나는 사람이 반이다. 나머지 반은 고생한다며 빵이나 물이라도 좀 주고 떠났다. 새파랗게 어린 자들이 함부로 말하며 등을 치는 것이나 잘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단언하며 무례하게 구는 것에도 익숙해졌다. 이사야는 많은 것에 익숙해져야 했다. 단언컨대 그의 물처럼 밀려가는 인생 계획에 이런 용납의 연속은 없었다는 것을 미리 밝힌다. 

 

그도 사람인데 욕망이나 야망 하나 없을까? 그런데 정말 없다. 그럼 옛날이야기부터 해야 한다. 마르고 작은 소년 이사야의 인생은 변성기에 큰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손가락을 끊어내는 추위 속에서도 한번 살아남았던 이사야. 보통 이런 때는 자신이 운 한번 제대로 좋았나 보다. 이러면 된다. 평생 하늘이 내린 재수에 감사해하며 살자. 그런데 이사야는 진짜 어딘가가 남들과 달랐다. 언젠가 계단에서 세 번이나 굴러 부러진 목이 저절로 원래 방향으로 돌아가며 실금까지 간 턱이 딱딱 붙고 깨져서 철철 피를 내며 부러진 이빨이 솟아난 날에 깨달았다. 마룻바닥에서. 영문 모르겠는 얼굴로 바닥에 묻은 출혈을 닦아내며. 그래도 모르면 그건 머저리다. 그런데 한술 더 떠서 서른 살이 좀 지나자 나이를 먹지 않았다. 보통 사람들 보면 서른 살쯤 되면 머리도 살짝 빠지고 주름도 지고 뱃심에 살도 주인 몰래 붙던데 이사야 에반스만은 그러지 않았다. 이봐, 이사야, 나 자신. 듣고 있나? 어렸을 때 그게 아무래도 꿈이 아니었나 보지. 나 아무래도 불로불사인가 봐. 하하! 질 나쁜 농담인걸. 참고로 농담이 아니다.

 

뭐, 그래서 그는 보통 사람들이 열여덟이 되기 전에 벗어나는 ‘나는 뭔가 다른 사람과 다른 것 같아’의 굴레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는 이야기다.

 

피쓰.


03

 

이사야는 도저히 살고 싶지 않던 그 삶을 모면하고 미하엘이 원하는 사람이 된 것 같은데 왜 이십 년이 지나도록 그는 돌아오지 않는 것일까. 착각인가? 이사야는 미하엘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것을 알아서 미하엘이 돌아오지 않는 것일까? 미하엘은 잠들기 전에 말했다.

 

“버려도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정말?”

 

“왜 그런 말을 하지요?”

 

“신부님,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이사야는 적어도 미하엘에 한해서 고집스럽게 닫힌 입을 자기 마음대로 해본 적이 없었다. 첫 번째. 눈썹을 좁힌다. 이런! 통하는 것 같지 않다. 두 번째. 팔짱을 낀다. 아쉽다. 이번에도 통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초심을 잃어버린다. 대신 힘주어 씹어뱉었다. 한숨을 곁들여서. 조금쯤은 지친 듯한 음성. 그리고 어쩌면 나른하게 들리는 어투로.

 

“후회하지 않아.”

 

촛불이 입김에 위태롭게 흔들리다 연기를 남긴 채 꺼졌다. 잠깐. 꺼진 게 정녕 촛불뿐이었나? 미하엘이 영영 사라지고 말았잖아. 하루하루 맥없이 살아가는 이사야는 이런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모골이 저절로 송연해지는 사연이 아닌. 녹아 없어진 동료의 눈물은 물론이거니와 빛처럼 부서진 은사님도 아닌. 단 하나 갈망하는 것을 잃어버린 죄 때문에. 어리석구나, 어리석어. 

 


04

 

 

오늘로 셀 수 없는 며칠째. 미친 과학자처럼 날짜를 헤아리는 짓은 질렸다. 게다가 구리 항아리 속의 악마처럼 구는 데에 이력이 났다. 듣고 있나요, 당신? 다음 달까지 깨어나면 당신이 원하는 사람이 될게요. 한 달이 지났다. 이사야가 또 약속했다. 올해까지 깨어나면 제 것을 모두 포기할게요. 그중에 당신이 들어간다고 할지라도요. 일 년이 지났다. 이사야가 맹세했다. 그것은 진실한 서약이자 응당 치러야 할 대가이기도 했다. 십 년이 지났다. 미하엘, 제발 일어나. 나 이제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게. 부탁해. 항상 당신의 곁에 머물면서 바라는 것은 모두 들어주며 거짓된 마음에서 행동하지 않겠다고 약속할게. 내가 그렇게 싫었어? 

 

그렇다면 미하엘, 네가 나를 싫어해서 다행이다. 

 

이런 생각에 미치자 그제서야 이사야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구리 항아리에서 빠져나와 미하엘의 곁에 앉는다. 몸집이 기울어지며 침대가 그 무게에 삐걱삐걱 소리를 지르다 한쪽으로 쏠렸다. 그는 미하엘의 얼굴 위에 손을 올려 오랫동안 보지 못한 눈의 빛깔과 차갑게 쏘아내는 안광을 상상했다. 이렇게라도 곁에 있다는 건 좋은 일이야. 적어도 미하엘은 이사야 때문에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잠들어 있는 한 눈꺼풀 아래 꿈 없는 잠에 빠져들어 이사야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 이사야가 미하엘을 보며 시간의 경과가 의미 없을 정도로 거멓게 죽어갈 때 미하엘은 마른 머리카락을 뒤척이기만 하겠지. 미하엘이 이사야를 살게 하고 또 동시에 죽이고 있다. 얼음은 다가서면 어울리고 붙어 결코 떨어지지 않고 불은 뜨거워도 서로를 잡아먹어 재만큼은 남기고 사라지건만 미하엘과 이사야는 왜 차갑지만 닿지 못하고 서로를 실컷 잡아먹는데 사라지지 못하고 있을까. 그래서 당신이 잠든 거지. 그럼 내가 재가 될 테니 당신이 얼음이 되어서 영원해줘. 그것 또한 불멸이야. ‘불멸이란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죽는 것이니까’. 적어도 우리 둘의 공통점 하나는 찾았군. 

 

그래도 그가 깨어났으면 좋겠다. 한번 미하엘이 있어서 살고 싶었고 지금 미하엘이 있어서 죽을 수 없다면 미하엘이 깨어났을 때는 어떤 기분이 들까. 일어나서 알려줘. 

 

알려줘.

 

그럼 당신에게 …… 

 

“버려져서 수천 번이나 후회했으면 이만하면 됐잖아.”

 

…… 이번엔 아무것도 바라거나 약속하지 않을 테니.

 


999

 

“이런 거였군?”

“네, 이런 거였어요.”

“혹시 내가 세상의 거대한 비밀 중 하나를 알아 버린 겐가?”

“그럴 리가 없잖아요. 제 비밀일 뿐이에요.”

“그렇군. 잘 있게.”

 

선생님, 아시는 분이세요? 

응, 옛날에 조금. 

그런데 무슨 소리예요? 그거… 아! 비밀이요. 

뭐? 당연히 비밀이지. 앞이나 좀 봐라. 

 

이름은 검고 눈은 푸른 남자가 멀어져갔다. 머리가 하얗고 속은 검은 남자도 그 남자로부터 멀어졌다. 둘 중 아무도 돌아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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