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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1/리퀘스트

7월의 클레멘타인

by 곽제가 2021. 7. 22.

Melting Waltz

https://www.youtube.com/watch?v=7gF6A04vZiI

 

 


 

붓자욱처럼 제자리를 맴도는 여자의 그림자를 드디어 견디지 못한 노신사가 아내를 향해 헛기침을 했다. 둘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고 자리를 뜬다. ‘면식 없는 이인데, 관광객이라도 되는 걸까?’ 멀어져가는 중에도 흘끔흘끔 여자를 쳐다본다. 그리고 모퉁이를 돌며 인영까지 사라졌다. 지붕 아래를 쏘아내리는 그 조명은 늦다 못해 하늘이 남색으로 가물해지는 오후에도 정오의 해님처럼 정수리 위에서 비추었기에 백색광이 여자 스스로에게 드리워져 오목한 곳이 새까만 칠흑으로 보였고 솜털까지 환한 나머지 얼굴은 흡사 빛으로 이루어진 덩어리처럼 보였다. 도무지 이곳과는 어울리지 않는 목 늘어진 면 티셔츠, 등판에는 해골이 소리를 지르고 있으며 말단에는 발가락을 모두 드러내는 샌들 차림인 그녀는 유령의 몸짓이 그렇듯 나긋하게 눈을 떴다. 핸드폰이 진동하고 있었다. 속눈썹처럼 부드러운 울림이었다. 그리하여 잽싸게 알아채기가 어려웠다. 겨우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일마?”

“응.”

“나 유디트인데.”

 

일마라고 불린 여자는 보이지도 않는 고개를 까딱였다. 뒤늦게 말을 덧붙였기에 유디트는 일마가 잠시 집중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그럴 수 있지. 독주회가 시작하기 겨우 몇 시간 전이니까. 그는 일마에게 벌써 도착했냐고 물었다. 일마는 그렇다고 했다. 배경음으로 명랑한 아이들의 웃음이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일마가 서 있는 곳은 옛 계급의 향수를 버리지 못한 자들이 뻐기듯 몰려오는 웅대한 콘서트홀 앞, 매일 새벽부터 깎아내는 잔디밭을 배경으로 민들레를 비롯한 들꽃이 피어 있어 종종 작은 소풍이 열리는 도시의 심장. 그리고 무엇보다도 일마의 작은 왕국이었다.

 

“그래.”

“정말? 이제 출발할게.”

“안 늦으면 대기실 왔다 가.”

 

신변잡기가 이어졌다. 그래서 오겠다는 건지, 말겠다는 건지? 일마는 언제나 변죽을 울리는 그의 말씨를 갑갑하다는 듯 끊어내고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유디트는 졸지에 말이 끊겨 뒷머리를 긁적거린다.

 

“당연하지.”

 

유디트는 투덜거리더니 까만 리본을 매고 계단을 내려오는 어린 소년을 보고 허리를 굽혔다. 소년은 아르하라고 불리웠으며 상당히 독립적이어서 여느 또래의 아이보다 훨씬 점잖았지만 필요한 근육이 제대로 발달하지 않은 채 홀로 소매 단추를 끼우는 데에는 무리가 있었다. 아르하는 얼핏 보면 귀여운 막내둥이로 보였으나 유디트에게로 시선을 옮기면 판단을 내리기 쉽지 않다. 그는 아르하의 아버지가 되기에는 어리고 형제라기엔 훤칠하다. 보통은 그 둘을 친척이라고 멋대로 결론지어 생각했다.

 

“일마를 보러 가는 거야.”

 

아르하가 그 말을 듣고 씩 웃었다. 제련한 강철처럼 빳빳한 소매에 단추가 제대로 채워졌다. 유디트는 서두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그의 목에 검은 나비 리본을 묶어 주었고 일마의 환심은 몰라도 체면은 살 수 있는 선물을 잘 챙겼는지 몇 번을 확인하고서야 차에 올라탔다. 기사는 오늘 물렸다. 어쩐지 그래야 할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유디트는 오랜만에 손수 운전하는 것이라 오랜만의 탑승이 아르하에게 미편할까 무던 애를 썼다. 에어컨, 에어컨을 돌려야겠지? 그러나 아르하는 알아서 잘하고 있었다. 게다가 대단히 신나 있었다.

 

“돌아올 때 일마 누나랑 크림스튜랑 양고기를 먹자.”

유디트는 별달리 고민하지 않고 대답한다.

“그럼 코코아도 마실래.”

 

부웅! 부드럽기는커녕 내이까지 떨리도록 울리는 엔진이 또렷하게 지축을 울린다. 그래도 말을 알아듣기에 넘치지 않았다. 홀은 그닥 멀지 않아서 둘은 장난을 치며 콧노래를 부른다. 유디트가 간혹 안전거리를 지키지 않아서 앞차가 살짝 앞으로 자리를 당기거나 도로에 익숙하지 않아 실수했을 때에도 콧노래를 불렀다. 어쨌거나 이 허영이든 연봉이든 무엇인가의 자랑스러운 지표가 되는 람보르기니를 남의 잘못으로라도 스치고 싶은 사람은 없는 법이다. 그들은 안전하게 콘서트홀까지 도착했다. 내릴 때의 선물도 잊으면 섭하다. 안내인은 표를 보고 입매를 안쪽으로 당겨가며 놀라움을 감춘다. 안쪽으로 들어선 둘은 서로가 넘어질까 싶어 가볍게 손을 맞잡았다. 희푸른 빛이 의자의 양옆에서나 겨우 비추고 있다. 조심해야지. 어르는 듯한 음성과 아르하의 손이 안락하게 오르는 크기에 명인이 보증하는 품질의 부드럽고 까만 가죽은 새것 냄새가 나서 그를 편안하게 했다. 둘의 자리는 연주자가 가장은 아니어도 손꼽히게 잘 보일 법한 맨 앞쪽 가운데 부근이었다. 돌아보자 듬성듬성 사람이 차 있는데다 시간이 오죽 남은지라 일마를 보고 들어가도 괜찮았다.

한번 연락해 볼까… 아, 유디트가 핸드폰에 뜬 ‘ㅇㄷ’ 라는 글자에 실소를 참지 못하고 터뜨렸다. 답장도 간단했다. ‘ㄱㄱ’. 그는 곧 벨소리의 응징을 받았다. 일마였다.

 

“오자마자 간다고?”

유디트는 침착했다.

“곧… 곧 감.”

“뭐?”

“곧 감의 준말인데…”

 

일마는 머쓱했다. 당장 연결이 끊어진다. 금방 그 희한한 말의 참뜻을 알아차린 것이다. 아르하가 이상한 눈길을 보내는 듯했지만 구태여 말해주지 않았다. 한 번 혼났으면 됐잖아. 일마가 기다리고 있는 대기실은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첫째로 직원에게 언질이 되어 있었다. 손가락을 따라가니 누가 함부로 들어서지 않을 만치 고요한 공간이 나왔다. 둘째로 일마가 근처에서 감시하듯 복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던 탓이다. 유독 드레스가 희어서 못 알아본다면 그것도 재주다. 병원에 자주 갈 재주. 아르하가 얼른 다가가 제대로 된 인사를 건넨다. 일마는 서로 간에 가까워지자 어린아이에게 으레 그렇게 하듯 두 손으로 들어 올려 안으려고 했지만 그는 곧 열 살이 된다. 꼬마라도 당연히 지켜야 할 자존심이 있겠지. 일마가 빠르게 결정한다. 그리고 아르하에게 어른의 예절을 지켰다. 한 손을 내밀어 악수하고 친애의 표시로 어깨를 가볍게 안았다. 유디트에게도 마찬가지로 했다. 일마는 시계를 보더니 잠시 노닥거릴 시간이 있다고 했다.

대강의 안부가 끝나고 아르하가 드레스를 만지작거린다. 일마는 실없이 ‘가질래?’ 하고 물었다. 줄 수 없긴 했다. 협찬받은 물건이라 돌려줘야 한다. 아르하는 물론 일마가 ’사실 안 되는 거라 미안하다’라고 말하기 전에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일마도 정말 주려고 물어본 것은 아니다. 아! 당연히 오해는 말길 바란다. 달라고 하면 뭔들 못 주겠는가? 그나저나 지금 선물을 받을 쪽은 일마였다. 이쯤 되니 일마가 왜 건네지 않느냐는 듯, 응당 자신의 것이라는 듯 손가락을 벌렸다. 맞는 짐작이었다. 장미 향기에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기에 유디트가 기쁘게 꽃다발을 넘겼다. 아르하도 그때까지 안고 있던 꽃을 건넸다. 장미라기엔 별처럼 파리한 색, 튤립처럼 부드러운 색, 안개꽃과 어울릴 법한 새붉은 장미들 사이에서 일마가 단 한 송이를 빼내었다. 제법 싱싱하고 얼굴이 큰 종이었다. 무늬 없는 화병에 물을 채우고 탁상의 가장자리에 장미를 장식한 일마가 나머지 장미도 마저 껴안았다.

 

“좋은 것으로 사 왔구나.”

 

긴장해서인지 일마가 치즈처럼 물러 보인다. 용기를 얻은 유디트가 선제공격을 감행한다. 2분이 채 지나기 전에 선선히 저녁 식사로 양고기와 크림 스튜와 코코아를 약속한 일마가 이어 축객령을 내렸다. 정신을 차리고 나면 이게 무슨 성의 없는 음식 조합인지 곰곰이 생각할 테지. 어쨌든 지금은 아니다. 아르하는 가물거리는 샛별과 함께 일어난 것이 무색하게도 날아갈 것처럼 신나 자리로 돌아갔다. 유디트는 그를 따라가느라 조금 애먹었다. 문이 닫히기 직전이었다. 휴!

오래지 않아 일마가 나타난다. 세례라도 받을 것처럼 희고 장식 없는 드레스였으나 얼굴은 공을 들여 상감한 옛 사형기구처럼 차가웠다. 가장 처음 초대받은 연주회에서는 그녀 자신이 초대한 사람들에게 선선히 웃어 보였지만 시일이 거듭함에 따라 일마의 얼굴은 날이 갈수록 웃음을 잃었다. 웃는 모습이 찍히기를 저어하는 것이었다. 아르하는 딱히 인사받을 기대 없이 일마에게 손을 흔든다. 유디트도 질세라 두 손으로 흔든다. 일마는 그 인사를 무시하려다 말았다. 그래서 일마는 또다시 웃는 모습이 찍히는 것을 감수해야 했다.

이슬처럼 가벼운 선율이 음향 설계를 업으로 삼는 이들의 카타르시스를 드높인다. 째지는 아기 울음소리도 찬란한 음악이 되는 이 홀에서 아름답게 들리지 않을 연주가 있을까? 포물선을 그리며 휜 벽과 고래도 헤엄쳐 다닐 법한 거대한 공간이 마술을 부린다. 아르하는 짓쳐드는 바람 같은 여러 개의 대무곡과 화사한 론도를 들으며 단 한 순간도 졸지 않고 정신없이 음정을 기억했다.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쭉 빼다가 유디트의 손에 가라앉았다. 그러는 유디트는 의자에 바싹 등을 붙인 나머지 없는 거북목도 씻은 듯이 낫기 일보 직전이다. 사람들은 짧은데도 정신없이 휘는 손톱이나 땀으로 미끄러지는 안경을 보며 조마조마한 듯 주먹을 쥔다. 박수갈채가 쏟아질 때마다 손수건으로 땀을 훔치는 일마의 모습에서 도리어 편안함을 느낀다. 일마는 가장 빛나는 순간에 평범해 보였다. 준비된 곡이 끝나고 앙코르의 차례가 왔다. 신청 곡을 받을 때에조차 일마는 관객에게 망신 주기를 거리낌 없이 했다. 가장 첫 곡은 이랬다.

 

“어려운 곡을 쳐 주세요!”

가벼운 분위기라 여러 곳에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음표가 많아야 어려운 곡인가요, 변조가 많아야 어려운 곡인가요? 느리면 어려운 곡이 될 수 없나요?”

 

그리고 일마는 동굴을 흐르는 냇물처럼 느린 곡을 하나 쳤다. 찬송가였다. 기십 명이 한 몸처럼 노래하는 성가대의 목소리를 여든 개 남짓의 건반으로 표현해야 했으므로 일마 자신은 어렵게 쳤다. 신청자는 기분이 어땠는지 몰라도 일마는 기분이 퍽 좋았다. 그래서 신청 곡을 여럿 받기로 했다. 그동안 아르하는 미련하게 자기 차례만 쏙 빼고 남의 소원만 들어주는 동안 팔을 들고 있었다. 유디트가 팔을 내려 주려고 했지만 아르하는 완강한 태도를 고수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일마는 팔꿈치를 얻어맞고 소리 없이 절규하는 유디트에게 짧은 비웃음을 날렸다. 그리고 파장할 즈음 일마가 아르하를 쳐다본다. 아직도 손을 들고 있었다. 이쯤 되면 보상이 있어야 한다. 일마는 오늘도 어김없이 꼭두새벽부터 일어났을 아르하의 하루를 망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아르하는 곧장 ‘클레멘타인! 클레멘타인!’ 하고 붕붕 팔을 흔들었다.

 

“내 사랑아, 내 사랑아,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

 

악보의 첫머리를 두드리며 일마가 입술을 열었다. 누구도 목소리를 듣지 못했지만 무어라 말하는지 명명백백하다. 벽을 허물고 서정에 젖게 하는 멜로디를 따라 아이들이 빠끔빠끔 입을 연다. 원숭이도 제법 따라 할 수 있을 만큼 간단한 곡이어서 재미있는 마음이 치밀어 오른 탓이다. 부모님 얼굴을 흘긋흘긋 훔쳐보기도 잊지 않는다.

 

 늙은 아비 홀로 두고 너는 어딜 가느냐…

“물 위에 떠 오른 루비 같은 입술.”

 

연주자는 자기 소매에서 나는 헤네시 코냑 냄새를 맡고 있었다. 하마터면 술이 튄 걸 잊어버릴 뻔했구나. 나갈 땐 탈취제라도 뿌려야지. 보드카와 진, 샤토 와인에 빠져 있을 때도 있었지만 요즘은 코냑이 좋다. 잘난 맛에 사는 사람들이 스스로 일컫듯 ‘애주가’라고 부르기에는 세속적으로 마시기만 해서 일마는 애주가라는 단어를 좋아하지 않았다. 유리도 아니면서 번쩍이며 빛을 투과시키는 가구나 머리를 마비시키는 향긋한 물에 불과하다. 저녁에도 한잔만 해야지. 느긋한 멜로디를 따라 졸음이 찾아온다. 일마는 졸음을 쫓고 작게 목소리를 내어 음을 따라 했다. 아무도 듣지 못했지만.

 

입에서 흐르는 거품이 맑고 정결해…

“그러나 나는 헤엄을 모르는 바보라,”

 클레멘타인을 잃어버렸어요.

 

연주가 끝난다. 일마가 턱으로 신호해 막을 내렸다. 두꺼운 천 사이로 유디트와 아르하를 볼 수 있었다. 양고기와 크림스튜, 그리고 코코아라 이거지. 초록색 눈이 박제라도 된 마냥 둘을 바라본다. 내가 무슨 정신으로 알았다고 했는지 몰라. 일마가 엉덩이가 배기는 것을 겨우 참고 일어났다. 그림자에 음영이 있듯이 고통에도 단계를 매긴다면 한 5 정도로 아파서 조금 절뚝이며 걸어간다. 하지만 일마는 이 시간을 좋아했다. 고통에 단계를 매기듯이 숫자를 붙이자면… 7쯤이랄까? 8. 9, 10은 더 좋을 때를 위해 남겨두고 말이다. 기꺼이 밖을 향한다. 일마는 어디로 가야 할지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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