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를 말하자면 해 질 무렵이었다. 계절을 가르자면 그런 것은 없었다. 사람이 살기에는 그리 좋지 않은 시대였다. 특히 사랑하는 두 연인이 살기에는 더욱더. 다만 이때에 구름이 수십 개의 주둥이를 뾰족하게 벼르고 이쪽에서 저쪽으로 하늘을 겹겹이 포개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단델리온이 오키드에게 손을 뻗었다. 팔꿈치의 오금에는 엄지를 얹고 그리고 바깥쪽을 손바닥과 나머지 네 손가락으로 감싸서 아주 가볍게. 먼 우주의 쌍성계처럼 서로를 맴도는 두 몸뚱이는 닿고 나서야 조금 더 완전한 궤도를 이룬다. 따뜻하다. 차갑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물처럼 체온이 섞여들며 가까워졌다. “힘들어?” “조금.” 듣는 이와 말하는 이, 처음과 끝을 분명하게 알기 힘든 대화가 입맞춤처럼 도란도란하다. 무엇을 말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언제나 같았으니까. 빛이 들어차고 물러가는 낮밤을 제외한 시간이라는 개념이 말라비틀어져 없어진 이 불변하고 고정된 세계에서 언어는 지금부터 눈짓을 나누자는 약속에 불과했다. 단델리온은 그것만 있으면 영속할 수 있다. 그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생각이면 충분하고도 남았다. 어리석기에 그는 마법사로 태어났다. 마법이란 그런 것이다. 그것은 제대로 모인다면 땅을 끌어올리고 바다를 낮추기도 한다. 그러니 단 한 사람을 위해 스스로를 소진하는 것쯤은 쉬운 일이지. 그래도 이 상태를 설명하기에 힘이 든다. 그는 학창 시절 벽 사이를 춤추며 지나가는 유령과도 다르고 반만 부활하여 썩은 발을 바닥에 끄는 시체와도 달랐다. 어쨌든 완전히 죽은 사람은 아니다. 오키드가 단델리온을 부정하지 않는 동안은. 오키드가 단델리온을 불러 주고 손가락을 얽어오는 한. 그런 거야. 우리가 서로의 곁을 지키고 있다면. 비록 단델리온의 심장은 차갑고 장기는 그 무엇으로도 찰랑이지 않지만. 더는 머리카락이 자라지 않고 병들지도 잠들지도 않는 삶이면 어떤가. 오키드가 바란다면 그는 신 한 명을 위해 깨어 있고 싶다. 그가 오키드에게 준 선물을 영원한 행복이라고 하면 이 시간은 영원 중에서는 겨우 찰나에 불과하니까. 네가 나를 살아있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그것으로 됐다고 생각해.
그러는 동안 해가 평원 아래로 떨어진다. 빛이 보라색으로 흩어지며 검어지는 시간이다. 근처에 마을이 있는가 번듯한 집이 한 채 보인다. 가을이라 그런지 오늘따라 달빛 아래에서도 가을처럼 누렇게 뜬 간지러운 잔디밭을 가로질러간다. (사실 이미 가을이 지나쳤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전기가 남은 시계를 찾기 전까지 이 표현에 대한 시시비비는 가리기가 요원하다.) 발밑을 살펴볼 필요는 없다. 낮은 풀 사이로 벌레 한 마리 뛰쳐나가지 않을 테니. 잔디밭의 끝에는 색이 벗겨진 모양 한번 은근히 예술적인 울타리가 있다. 넘어가려고 서로 상대방의 도움을 받아 턱을 하나씩 올라가서 훌쩍 뛰어내린다. 울타리 안쪽 정원에 구경거리가 있으면 좋았겠으나 계절이 없는데 가을꽃이 있으랴 다른 많은 것들과 마찬가지로 거의 다 죽어가거나 즙 빨아 먹는 작은 벌레만 끓기에 어디 쳐다만 보기로 한다. 그는 바스러진 정원을 지나치며 오키드에게 아름다운 것을 선물하고 싶어졌다.
“안쪽 보고 올게. 가만히 있어.”
“응.”
루모스. 빛이 매달린 지팡이가 유성처럼 짧고 희게 빛난다. 이 근방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일 게 명명백백한데도 그냥 놓아주고 싶지 않다. 입 밖으로 굳이 내뱉지는 않았지만. 어렴풋한 빛이 동그랗게 고이고 그림자가 물러가는 얼굴에 입술을 두세 번 정도 누른다. 턱을 붙잡았기에 두 손 한가득 머리카락이 넘쳐흐르다가 손을 잡아 내리는 것에 아쉽게 떨어지고 말았다. 다녀올게. 다녀와. 오키드가 안으로 들어가자 남은 이도 발을 옮긴다. 이유 없이 들뜬 마음이 든다. 아주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이다. 자기도 모르게 심장에 댄 손바닥에 열이 오르는 기분까지도 든다. 만약 체온이랄 게 느껴진다면 섬유에 문질러진 마찰열에 불과하겠지만 제법 큰 건물을 돌아 뒤뜰에 들어선 순간 그는 자기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한동안 아무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아 뻑적지근한 몸에 공기가 들어찬다. 지붕에 매달린 풍향계의 비스듬한 그림자가 장미 나무 한 그루에 걸려 있었다. 푸르다. 불가능을 기적으로 빚어올린 파란 장미다. 살아 있는. 그 뿌리로 생각도 할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한. 배열이 완벽하다기엔 듬성하고 바람이 지나가는 조그만 흔들림에 죽은 이파리가 저절로 솎아져 바닥으로 하늘하늘 떨어진다. 병충해와 지난한 세월을 싸워 이긴 흔적이 줄기며 가지에 섬세하게 돋아났고 이 광야에서 이슬이 낟알처럼 수없이 맺혀 축축하다. 가까이 다가간다. 안쪽에 매달린 리본을 풀어내자 수종이라고 생각되는 라틴어가 적혀 있었다. 입가에서 시작된 감정이 온몸을 따라 굽이굽이 몰아쳐 흐르고 벌어진 입에서 한 개의 이름이 새어 나오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오키드.”
나는 왜 네가 그리울까. 왜 이름을 부르면 뛰지 않는 가슴이 에는 것처럼 시릴까. 단델리온은 장미 나무에 이마를 가볍게 대고 제자리에 가만히 섰다. 눈이 내린다면 눈썹 위로 쌓이고 말 긴 시간이 흐른 후에 오키드가 돌아온다. 그 소리는 노력이 없이도 알 수 있다. 그의 세상은 오키드의 소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단델리온에게서는 그 어떤 소리도 나지 않았으므로. 특히 이처럼 바람이 벽에 맞아 고개를 돌리는 장소에서 단델리온이 아무리 오키드를 외면하려 애쓰더라도 그의 숨소리와 박동과 오래 걸은 관절이 뻑적지근한 소리가 귓구멍을 가득 채우고 살아 있는 사람의 숨결을 불어넣고는 했다. 오키드가 그를 부른다. 돌아본다. 날씨가 서늘한지 낯선 숄을 빌려서 걸치고 있었다. 결여가 송곳이 되어 명치에 박혔다. 나는 이제 너를 예전처럼 살필 수가 없구나. 손짓해서 오키드가 더 가까이 오게 한다. 그렇게 하면 단델리온은 죽은 자로서 아무것도 소유할 수 없되 오키드의 안에서부터 데워진 숨결을 빼앗아 자신의 폐로 들여보낼 수 있다. 그러면 잠깐은 서로를 완전히 소유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것도 아닌데도. 눈을 감고 잠깐 입을 맞춘다. 두 개의 숨이 뒤섞이는 걸음걸이처럼 헝클어진다. 어깨와 옆구리에 가닿은 손을 따라 살결이 우그러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내가 너에게 완벽히 맞물리게 된다면. 떨어지고 나서도 단델리온은 오키드를 안고 있었다. 말 없는 장미나무는 퍽 점잖았기에 두 사람에게 핀잔을 주는 법이 없다. 다시 한번.
오키드에게 아름다운 것을 선물하고 싶어졌다.
허리를 더 기울여 오키드를 고쳐 안는다. 그가 영혼을 하염없이 깎아내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아니면 이 순간이기에, 혹은 시간을 잴 필요도 없이 언제나 그는 자신의 끝을 오키드에게 묶고 싶었다. 마지막 사랑이고 남편이고 싶다. 그가 신랑이 될 자격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다행스럽게도 장미나무에게는 주례를 설 자격이 됐다. 이토록 살아있으니까. 오래된 것. 키스. 입술이 부딪힌다. 낯설지 않다. 눈을 감았었나? 새로운 것. 마법. 수 개의 빛이 떠오른다. “단델리온! 뭐 하는 거야?” 빌린 것. 숄. 양모로 짜고 매듭마다 술을 달았다. 조금 뒷걸음질을 쳐서 장미나무의 정면에 선다. 푸른 것. 장미. 황야의 보석이지. “그냥.” 잠깐 머뭇거린다. 그가 말을 하려는지 입을 맞추려는지 정확히 몰라 오키드가 다시 한번 입을 맞추지 않았다면, 그래서 머리가 하얀 불로 달아오르지 않았다면 조금 더 멋들어지고 다정한 말로 할 수 있었을 텐데.
“죽는 순간이 오면, 아니, 오더라도…”
“말해.”
“나는 네 마지막 사랑이고 싶어. 남편이고 싶어. 너를 내 것으로 하고 나는 네 것으로 하고 싶어.”
마음이 조약돌처럼 달그락거린다. 처음엔 말이라면 족했다. 그런데 말하고 나니 그 다음에는 약속받고 싶었다. 소유를 증명하고 싶었다. 낮은 웃음소리가 부둣가의 바람마냥 몸을 흔든다. 두 사람이 가까워 속절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하면 춤추는 연인 같지. 오키드가 그를 부디 지독하게 동정해서 손은 아프지 않도록 가볍게 맞잡고 피로연이 없더라도 춤을 출 때에는 아주 약간은 무게를 실어서 매달려도 좋을 만큼 주의 깊게 안아주기를. 그를 생자로 만드는 마법이 완전히 부서진다면 아무리 미워도 울지는 말고 만약 분노를 터뜨린다면 감내할 테니 목소리를 낮추어주길. 우리의 마지막 순간이 어떤 형태로 찾아올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바라기만 하도록 허락해 준다면, 오키드, 나는...
“단델리온, 나는…”
너만 있으면 무엇이든 괜찮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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