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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0/하스마

H-05

by 곽제가 2021. 7. 25.

하스마&다프네

 


 

“비밀 이야기 해도 돼? 말하는 순간 비밀이 아니게 되지만, 그냥 할래. 난 아직 누구도 좋아해 본 적 없어. 그러니까, 보통 사람들이 사랑이라고 말할 정도까지 말이야.”

 

흠! 살짝 예상했던 바다. 하스마의 인생에 사랑이 찾아올 날 있을까? 하스마 앞에서 처음으로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 것은 살갑고 정 많은 친척 큰언니였다. 카사블랑카의 화려한 낭만 뒤에는 여느 가난한 지구가 그렇듯 구걸과 날품팔이가 꽉 차 있다. 겨우 문맹을 면한 꼬마들, 관광객이 길을 물으면 프랑스어로 ‘아니, 아니요. 프랑스어 아니요.’ 영어를 한다 싶으면 ‘노 잉글리시’를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는 노인이 즐비한 골목에서 그 언니는 사랑을 약속했다고 한다. 상대 남자는 검은 눈에 갈색 고수머리를 한 베르베르계의 훤칠한 청년으로 딸린 식구가 여럿이요 개천에서 난 용이었기에 반대에 부딪혀 언니와 헤어졌다. 언니는 처절하게 울었다. 소처럼 큰 눈망울에 봇물 터지듯 차오르는 배우의 눈물이 아니었다. 언니는 먼저 무릎을 꿇고 벽에 이마와 손바닥을 기댔다. 그리고 쇠를 가는 듯한 음성으로 짐승처럼 신음을 냈다. 언니는 다다음 해에 다른 남자와 결혼했다. 나이가 비슷하고 항상 주눅 들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게 흠이다만 그는 길 가다가 입던 외투를 벗어서 판대도 사갈 사람이 생길 정도로 차림새가 번듯했다. 집안만큼이나 턱선도 골자가 좋았다. 그런 남자와 결혼하는 언니는 그렇게 불행해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하스마가 아는 사랑이었다. 

 

언니가 머리카락에 기름을 바르는 동안 할 일이 없다. 갑자기 부모님이 눈에 들어왔다. 두 집안은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았고 둘은 언제나 상호 간에 예의를 지켰다. 한 집 건너 한 집마다 부인이 맞고 사는 일이 빈번한데 하스마의 부모님은 그러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여겼다. 비단 어머니의 기량이 뛰어나서만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쥐새끼 하나도 못 죽여서 풀어주려고 먼길을 떠나는 사람이다. 어린 하스마는 부모님이 서로를 사랑하는지 궁금했다. 정원으로 향하는 뒷문을 벌컥 연다. 돌쩌귀가 우는 소리에 엄마가 허리를 들었다.

 

 

“엄마는 왜 아빠랑 결혼하셨어요?”

“성격이 밝아서.”

 

의외인데? 하스마가 거실로 달려갔다.

 

“아빠는 왜 엄마랑 결혼하셨어요?”

“엄마한테 물어보렴.”

 

 

그것은 부끄럽다기보단 사랑 따위의 여흥에 관심을 주기 싫다는 어투였기 때문에 여기서 하스마의 탐험은 막을 내렸다. 역시 결혼식이 있는 날에 묻는 게 아니었다. 나중에 꼭! 물어봐야지. 그러나 개학과 함께 다짐도 허공으로 날아갔다. 사랑은 미스터리다. 하스마는 아직 아무도 사랑해본 적 없고, 잘 모르겠지만 누가 자길 사랑하지도 않았다. 그런 채로 몸만 자라 열네 살이 되었다. 어렸을 때와 바뀐 점은 키 정도일까? 하나 더 있긴 하다. 막상 자긴 누굴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누가 날 남몰래 라도 좋아했으면, 하고 바라게 되었다. 이해해달라. 원래 어린애들은 좀 비합리적이다. 여기서 대가리는 안 크고 몸에 주름살만 늘면 청년정책에 좀비처럼 반대하는 노인이 되니 모두 반면교사 삼아 어릴 적부터 책을 많이 읽자. 그런데 그건 정말 일어나든 말든 상관없는 바람이다. 아니, 오히려 정말로 현실이 된다면 당혹스러울 것이다. 사랑은 원래 양방향 소통이다. 잘은 모르겠지만 세상이 그렇다고 한다. 여기 당혹스러운 게 하나 더 있다. 다프네다. 다프네 라스카리스, 여섯 글자로 늘이면 흑발에 미친 녀. 사귀고 헤어지고 눈 돌리면 사귀고 아직 안 헤어졌나 싶으면 딱 그때 헤어지고. 하스마는 다프네를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하스마는 커뮤니케이션을 맞는 말과 틀린 말로 나누었는데 다프네는 돌아버리신 말만 했다. 

 

“모든 사람은 사랑할 만한 구석을 하나씩 가지고 있거든. 난 그렇게 믿어!”

 

그럼 이상형이 아닌 건가? 이건 맞는 말인가 틀린 말인가? 아니면 그냥 다프네스러운 말인가? 하스마도 돌아버릴 것 같았다. 사실 사람을 좋아하는 데 꼭 이해가 필요한 건 아니다. 인간의 사랑이란 한 고등생물이 다른 고등생물과 정신적으로 합일하는 치밀한 과정이 아니라 그냥 호르몬의 움직임이다. 나에게 친밀하게 군다 싶으면 헤프게 마음을 써버리는 정이다. 소매 안쪽을 만지거나 깨어나기 전부터 곁을 차지하는 것만 사랑이 아니다. 귀중하게 여긴다면 모두 사랑의 한 갈래라고 할 수 있다. 기분 상하지 않으면 좋겠고 즐거웠음 좋겠다. 대가 없이 베풀어도 아깝지 않다. 

 

또 감정에 증명이 필요할까? 

 

등을 돌리고 앉아 서로의 세계를 전혀 공유할 수 없더라도 그 등을 붙이고 있을 수는 없을까? 보이지 않는 어깨 뒤로 가끔 사과를 나누어 먹을 수는 없을까? 잘은 몰라도 그래그래, 너는 그렇구나. 아무래도 좋으니까 일단 과제 어디까지 썼어? 따위를 논할 수는 없을까? 하스마만큼 다프네도 어리다. 한 번도 사랑을 해보지 않았다는 것쯤은 평범한 일이다. 보지 못한 세계의 물리법칙이 궁금할 때도 있겠지. 

 

그럼 하스마는 이렇게 질문할 테지: 다프네의 세계는 뭐 때문에 저렇게 요지경으로 돌아갈까? 그럼 답은 하나다. 맞는 말과 틀린 말 중 아무것도 선택하지 말자. 세 글자로는 네니오라고 한다. 새로운 시도다. 잘 될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하스마는 잠시 침묵하다 말했다. 틀린 말을 하더라도 무슨 상관인가. 쟤는… 다프네인데. 같이 틀린 말 해주겠지.

 

“음… 그럼 진정한 사랑을 찾기 위해 일단 샘플부터 늘리는 거네? 다프네! 너 깊은 생각을 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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