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갔다. 아, 나갔다. 아이들을 보낸 이후 두 걸음 만에 집으로 돌아와 다양한 철학적 질문을 던지고 실컷 후회하던 헨리에타는 아이들이 나간 그 순간 뜻밖의 사실을 발견하고 그답지 않게 작은 탄성을 질렀다. 아직 ‘고정된 그 순간’이 찾아오지 않았는데도 하얀 머리카락에 탄력과 힘이 차오르며 붉게 쏟아지고 옷 품을 헐렁하게 채운 마른 몸이 옹골차게 영근다. 몸이 거대한 변화에 놀라 자신도 모르게 엉거주춤 겨우 서 있다가 애써 걸음을 옮겨 거실의 소파 의자에 앉았다. “모두 나갔구나.” 같은 말을 두 번 더 소리내어 말했다.
“모두 나갔구나.”
“모두 나갔어.”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들뜬 목소리가 거칠 것 없이 공기 중을 빠르게 퍼져나갔다. 헨리에타의 기억은 마담 졸탄이 살아온 40년 남짓한 인간으로서의 기억 위에 하루살이의 삶처럼 짧고 강렬하고 무수하며 구성이 엇비슷한 시나리오가 시간의 순서를 무시한 채 한데 포개어져 이루어져 있었고, 앞으로도 네버 엔딩 스토리일 예정임이 분명했으나, 지금부터는 어찌 되어먹었든 새로운 삶(코딱지만 한 영지의 주인으로서)을 살 준비를 할 때가 왔다는 게지. 헨리에타는 그 사실을 못내 견딜 수 없으리만치 환희에 가득 찼다. 자신만의 해방이 아니라 헨리에타가 알고 헨리에타를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의 해방이 기꺼워서. 창문가에 앉는다. 새벽녘의 파란 하늘과 노을 즈음의 다홍으로 물들어가는 하늘은 잘 보이지만 해가 뜨고 지는 빛이 얼굴 위로 드리우거나 해서 사람을 거슬리게 하지 않는 좋은 자리였다. 오로지 인간 헨리에타 루이스 졸탄. 그 한 사람만을 위해 지은 아름다운 하얀 집다웠다. 헨리에타는 그곳에 앉아 며칠이고 시간을 보냈다. 지루하지 않았냐고? 전혀. 그녀는 하루 온종일 앉아서 지하실의 그림이 빠져나가는 빈 공간감을 느꼈다. 마침내 익숙한 음성이 드문드문 들려오는 귀여운 소음이 귀를 간지럽히면 창문을 열어젖히기도 했다. 이때,
“마담!”
하고 놀랍고도 반가운 짧은 비명이 나고서야 일부러 손을 흔들었다. 언젠가 그림이 홀에 걸리면서 누가 볼까 저어해 그런 짓은 하지 않게 되었지만 그때까지는 쏠쏠한 재미였다. 헨리에타는 점점 그림의 마법이 존속하는 하나의 축이 되어갔다. 창문가에 앉아 바깥을 보다 손을 휘적거리면 하늘이 사라지고 수십 명의 소녀들이 한데 모여 춤추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여전히 헨리에타의 올빼미들은 그녀에게 아는 척하기를 즐겨 했다. 몰래 기숙사를 빠져나와 홀까지 와선 자기 할 말을 잘잘잘 멋대로 수다 실력을 뽐내거나 남들 다 있는 데서 찡긋 윙크를 하는 식으로. 또 줄창 아무 기색 없다 졸업할 때가 오자 서로 손을 맞잡은 채 “마담, 이제 저 졸업해요…” 하는 아이들이 있었고 혼자 와서 헨리에타를 한없이 올려다보다 그냥 발걸음을 돌리는 아이가 있었다. 누가 살갑고 누가 아니었다는 게 섭섭하진 않다. 아이는 자라고 시간은 흐르며 기억이 잊혀진다. 이 그림이 영원토록 살아 있지 못한다는 지당한 사실처럼.
데쿠스 여학교가 다시 겨울로 접어든다. 일 년이 흐른 것이다. 헨리에타는 그때까지도 어디로 가지 않고 창문가에 앉아 있었다. 그림은 여전히 헨리에타의 당부대로 햇빛이 찬란하게 쏟아지는 홀에서 교묘한 응달에 위치한다. 헨리에타는 그곳에서 나이 들어가는 ‘헨리에타’의 모습을 보았다. ‘헨리에타’는 피아노를 잘 쳤다. 신기한 일이었다. 건반을 다루는 데 맛이 들리고 나이를 먹으며 성격이 변하는지 인간의 생애에서 그리도 짧은 시간뿐이 지나지 않았는데도 이젠 연주와 함께 멜로디를 흥얼거렸다. 헨리에타라면 하지 않을 행동이었다. 인간은 변하고 그림은 변하지 않는다. 그뿐이었다.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헨리에타는 쓸쓸한 감정을 느꼈다. 가슴께를 내리누른다. 박동 없는 심장에 부는 바람이 소슬하다. 그래도 햇빛과 한기를 번갈아 머금어 미지근한 섬유로 만들어진 몸뚱이에 온기가 차오르는 날이 있다. 이를테면, 세상으로 기꺼이 내보낸 어린애들이 그녀를 잊지 않고 찾아오는 아침 같은… …
따뜻하시죠? 쓸쓸하시지 않도록 자주 보러 올게요, 마담 털실.
덕분에 따뜻합니다. 이곳은 언제나 같습니다. 그곳은 춥거나 덥겠지요. 공부에 매진하세요, 마드모아젤 나이팅게일. 외에도 모두 잘 지내길 바랍니다.
들을 수 없는 인사를 남기며, 잘 가요. 살펴 가세요.
마담 털실 배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