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그리드&에이미 좀비 아포칼립스 AU
사람은 열다섯 즈음이 되면 처음으로 세상을 탓하게 된다. 그 전에는 자신을 탓하고, 그 이후에는 남을 탓한다. 잉그리드는 남탓하는 데에 더없이 익숙했다. 끝없이 자신이나 세상을 비난하기에는 정신력이 모자랐다. 자신을 탓하면 마음이 메마르고 세상을 비난하면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인간의 삶은 부싯돌로 태우는 난로처럼 하루치의 어둠만을 사르지만 종류에 따라 결말이 정해져 있다는 점은 항성의 세계와 별다르지도 않다. 어쨌든 잉그리드는 남을 탓한지가 너무 오래되어 아이들을 이해하기에는 살짝 늦었다. 그러고 싶었다면 조금 일찍 태어나는 게 좋았을 것이다. 아! 아니면 영원히 늙지 않거나, 철없이 사는 방법도 있겠지. 둘 다 군인의 덕목은 아니다. 군인이 된다면 누구나 잽싸게 남탓하는 법을 배운다. 살인기술을 배운다는 건 그렇다.
멍청한 소년들은 침대에서 사타구니나 긁적거리며 ‘살인병기’ 니 ‘죽음’ 이니 ‘돌격소총’ 따위의 단어들이 주는 느낌을 한없이 동경하지만 실제로 이 세계로 들어와보면 군인이든 경찰이든 그네들이 동경하는 마피아든 뒤지게 구르다가 살인을 정당화하고 적어도 의사에게 달려가 바짓가랑이를 붙잡을 힘은 남겨두기 위해 남탓하는 법을 배운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하아, 에이미가 빨리 남탓하는 법을 배워야 할텐데. 에이미는 잉그리드가 그러했듯이 사춘기가 되었다.
사춘기! 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단어인가. 로미오와 줄리엣도 사춘기에 목숨을 날렸고 얼마 전까진 청소년들이 SNS로 사회적 자살을 일삼는다며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었다. 딱 그 시대가 가장 좋았다. 어느 배우가 그랬지 않는가? 자긴 사춘기 때 방구석에서 조용히 병신이었다고. 그렇지만 지금은 셰익스피어의 시대보다 훨씬 무서운 때이다. 함부로 행동하면 어른이라도 죽어버리고, 함부로 행동하지 않더라도 운이 나쁘면 목이 사과처럼 베이고 만다. 나인투식스 데일리 루틴은 커녕 수면권조차 지켜지지 않는다.
사회가 붕괴했다. 정부는 역할을 하지 않는다. 군대는 와해되었다. 잉그리드는 와해된 군대의 일원으로서 그래도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자 했다. 민간인을 지키는 일이 그것이다. 그러나 제대로 되지 않았다. 잉그리드에게는 지켜야 할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에이미로 잠시라도 돌보지 않으면 위험에 빠지고야 마는 어린아이다. 살인은 커녕 워커를 죽여본 적도 별로 없다. 에이미는 자신이 아주 강하다고 착각했지만 현실은 냉혹하다. 잉그리드는 언제나 에이미를 지켜야 했다.
아이의 정신은 아주 취약해서 언제나 돌보고 아껴주어야 한다. 뺨이 발그레하고 동그란 얼굴엔 안도가 차오르고 밟혀도 일어나는 잡초처럼 질김이 있어야 한다. 전쟁터의 어린아이들은 쉽게 미친다. 트루먼도 그걸 잘 알았다. 아는 사례가 수두룩했다. 그래서 에이미를 잉그리드에게 맡겼다. 정확히는 가족들 모두를 맡겼다. 어떻게 되먹은 사고방식인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랬다. 새빨갛고 퉁퉁 부은 신생아 시절부터 그애를 봐와서 그랬을까? 그애의 어머니와 각별해서? 그 첫째도 자기 조카처럼 사랑했기에? 할 일이 있다며 떠난 트루먼을 잉그리드는 붙잡지 않았다.
대신 에이미의 집을 찾으러 갔다. 나머지 가족들은 죽고 에이미만 살아있었다. 잉그리드는 막연하게 셋 다 살아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에이미만 이빨을 덜덜 떨며 차가운 통조림을 뜯어 먹고 있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때 약간 울었던 것 같다. 그때부터 에이미를 목숨처럼 지켰다. 에이미마저 지키지 못한다면 잉그리드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
답은 에이미가 사라지기 전까진 아무도 주지 않는다.
에이미는 생각보다 잘 자랐다. 팔다리에 힘이 붙고 판단력이 생겼다. 철이 너무 빠르게 들긴 했다. 일종의 어른아이였다. 잉그리드는 내심 에이미를 자랑스러워했다. 그애는 하나를 가르쳐 주면 최소한 둘이나 셋은 알았다. 에이미와 지내며 행복했다. 아니, 행복하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잉그리드는 그렇게 되뇌었다. 혼잣말도 현재진행형이어야 한다. 아니면 에이미를 잃어버릴 것만 같았으니까. 지금 눈에 생기 대신 물기가 차오르는 그 두 눈을 지킬 각오를 해야 하니까.
“당장 에이미를 놔.”
남자는 말없이 칼날을 더욱 턱밑에 대었다. 그러자 여린 살갗에서 한 방울의 피가 배어나왔다. 그래. 그냥 해본 소리였지. 잉그리드는 손을 말아쥐다 총을 떨어뜨렸다. 발로 차자 총이 빙글빙글 땅 끄는 소리를 내며 시야 밖으로 사라졌다. 남자는 그 소리가 멈출 때까지 잉그리드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그는 이제 보니 푸른 눈을 갖고 있었다. 아까 전까지는 전혀 궁금해하지 않던 사안이었다. 물건이나 다름없는 포로에서 위협자가 되자 남자의 모든 것이 머릿속으로 속속들이 들어왔다. 죽여버린다. 에이미는 간절하거나 아니면 아예 포기한 것처럼 보였다. 그런 눈에 외려 잉그리드가 상처받았다. 그런 표정을 하지 않게 만들려고 잉그리드가 무진 노력하지 않았나. 두 무릎이 땅에 닿았다. 약간 젖은 흙이 천 너머로 뭉개지는 감각이 선연하다. 그애를 놔줘야 한다. 그가 사람이라면 에이미를 놔줘야 한다. 후디니가 와도 결코 혼자 풀 수 없는 매듭이다. 범인은 필경 에이미다. 끝까지 그를 풀어달라고 주장했으니까.
남자는 눈 굴리는 시늉도 하지 않고 대번에 소리쳤다.
“그럼 당장 애 데리고 꺼질 테냐?”
“그래.”
덥수룩한 수염 사이로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그는 이 은신처를 차지할 셈이었다. 일이 쉬워 보였을 것이다. 실제로 그의 바람대로 되지 않았나. 그가 에이미의 목을 더 조이고 칼을 까닥였다.
“그럼 쳐 기어들어가서 짐 싸. 글로시 카운티 표지판에서 보지.”
오지 않는다면? 그러나 생각할 겨를이 없다. 잉그리드는 당장 오두막 안으로 들어갔다. 에이미는 남자의 팔을 풀려고 바르작거리고 있었다. 손이 달달 떨렸다. 남자를 잡았을 때 망설이지 말았어야 했다.
여기 살게 된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텃밭에서 채소가 아무렇게라도 자라고 집안은 깨끗했다. 곰이 나오는 지역이라 벽이 탄탄한데다 무기까지 있었다. 잉그리드는 이 집을 발견했을 때 거의 비명을 지를 뻔했다. 에이미도 이곳을 맘에 들어 했다. 내 눈에 보석이면 누구에게나 그렇다. 몇 달이 지나자 결국 누군가 이곳을 찾아냈다. 남자는 방심한데다 약해빠져서 제압은 쉬웠다. 문제는 에이미였다. 에이미가 돌연 뛰쳐나와 사람을 죽이면 안된다며 잉그리드를 말리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남자는 돌돌 묶여 창고로 들어갔다. 결국 에이미가 남자를 풀어준 모양이었다. 그 대가가 이것이다. 사람들은 친절을 베풀면 갚지는 못할망정 이런 짓을 한다. 믿지 못하는 사람을 살려두는 것도 천국에 이름을 올릴 만한 친절이 아닌가? 그런데 오히려 어린아이를 납치하다니? 남자는 아마 다른 생존자 그룹의 사람일 것이다. 쥐새끼처럼 염탐이나 하다가 걸린 걸 보니 말이 안나오게 무능력한 모양인데, 나는 이런 새끼한테 에이미를.
입술을 짓씹는다. 피냄새가 날까봐 참는 것도 한두 번이었다. 결국 입술에서 오랜만에 피가 터졌다. 챙길 짐은 별로 없었다. 옹졸하게 작은 스푼 두 개, 포크 두 개, 캔따개 하나, 통조림 몇 개… 뛰쳐나왔을 때 남자는 이미 없었다. 총도 사라진 채였다. 불안했다. 단 한 발로도 사람은 쉽게 죽는다. 원래 그렇게 만들어진 무기니까. 오솔길을 달려 숲 밖으로 뛰쳐나왔다. 형체가 보였다. 에이미가 표지판에 묶여 있었다. 달려야 해. 뭔가 이상해. 저렇게 있어선 안 돼. 무시무시한 직감이 등골을 사로잡는다. 에이미는 혼자지만 혼자가 아니라는 직감, 당장 달려가서 풀어줘야 한다는 일념. 에이미가 갑자기 묶인 끈을 풀려고 버둥대었다. 에이미는 겨우 소리치지 않고 있었다. 입이 벌어지고 침이 떨어지는 모습이 보인다. 그때에야 에이미가 잉그리드를 발견했는지 눈이 마주친다. 에이미는 달려오는 잉그리드를 망연히 바라본다. 그리고 갑자기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는다.
수풀 사이로 썩은 팔이 빠져나왔다. 푸른 린넨 셔츠였고 금이 달랑거리는 턱주가리가 반쯤 날아간 워커였다. 그것이 에이미를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총이 없어. 안돼. 안돼. 너무 멀어. 에이미의 뺨에 손가락이 닿는다. 에이미의 신음이 들렸다. 공포와 절망에 가득 질려 입에서 자기도 모르게 꺽꺽대는 것처럼 우는 소리였다. 묶인 몸은 마음처럼 쉽게 굽어지지 않았다. 얼굴을 최대한 옆으로 돌렸지만 한 뼘도 채 움직이지 않았다. 반경이 짧은 발길질에 맞더라도 워커는 지치지도 포기하지도 않는다. 잠시 주춤할 뿐이다.
이성을 잃은 몸짓이 워커를 수없이 때렸지만 다리나 명치에 닿을 뿐이다. 자꾸 뒤로 밀려나던 워커는 결국 에이미의 발을 피해 조금 돌아 움직였다. 그럼 그것의 이빨은 모가지게 닿게 된다. 경동맥이 끊어질 것이다. 비명이 들릴 것이다.
“아아아아… …”
나는 에이미를 지키지 못하나? 이렇게 어이없이? 그애는 결국 처음 보는 철근에 묶여 먹이가 되나? 죽는 방법은 다양하다. 총에 맞아도 되잖아. 차에 치여도 되잖아. 하다못해 수술하다 죽어도 되잖아. 왜 살이 통째로 씹히는 고통을 맞이해야 하는데? 어린아이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데? 왜 실수했다는 죄책감과 무력감 속에서 죽어야 하는데? 한없는 영원 속에서 잉그리드가 계속 달렸다. 죽여버린다. 이빨을 죄다 뽑고 눈도 뽑아 바닥에 으깨버린다. 아니면 너를 그냥 놓아줄게. 부탁해. 부탁이야. 단 한번도 넘어지지 않았는데도 닿지 못했다. 잉그리드는 이제 울고 있었다. 와중에도 에이미의 말이 들렸다. 에이미는 잉그리드에게 이렇게 말했다. ‘죄송해요.’ 네가 죄송할 게 뭐가 있어. 왜 그래. 왜 그런 말을 해. 왜…
탕!
탕!
탕!
폭음이 귀를 찢었다. 어깨에 한 발, 모가지에 한 발, 머리에 한 발. 워커가 쓰러진다. 에이미의 얼굴에 썩은 피와 여타 체액이 섞여 후두둑 떨어졌다. 그제서야 잉그리드가 에이미에게 닿았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에이미를 묶어놓은 천을 찢어발겨놓았다. 그래야 약간이나마 분이 풀릴 것 같았다. 워커의 살점이 묻은 것을 모두 닦아내었다. 그제서야 총알이 날아온 방향으로 얼굴을 들었다. 아무도 없었다. 대신 탄피가 셋 떨어져 있었다. 그때 에이미가 잉그리드에게 엉금엉금 기어왔다. 에이미는 잘못했다고 빌었다. 다시는 함부로 행동하지 않을게요. 이모 말 들을게요. 잘못했어요. 그렇게 말하며 잉그리드의 옷을 연신 당겼다.
에이미는 잉그리드의 눈물을 보고 다소 충격받은 듯했다. 잉그리드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잉그리드가 마른 입술을 침으로 축였다. 그리고 에이미에게 말해주었다.
“나도. 나도 네 말을 들을게.”
에이미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무시하지 않을게.”
“무조건 아니라고 하지 않을게.”
“다른 사람들을 연민할게.”
“힘으로 찍어누르지 않고, 대신 너와 대화할게.”
그리고 에이미의 얼굴을 안았다. 얼굴을 쓰다듬고, 눈물 자국이 난 곳을 닦았다. 묶인 것 때문에 피가 통하지 않는 손목을 꾹꾹 다시 눌렀다. 에이미는 살아 있다. 쭉 살아 있을 것이다. 에이미는 다른 사람들을 연민하고 사랑하고 베푸는 방식으로 살아남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살아있어야 했다. 살아있을 것이다. 이 시대의 평균 수명보다 훨씬 오래, 새로운 시대 정신을 만들어가며. 에이미는 누구나 인간성을 버리는 나이에 사람들을 용서하게 되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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