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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0/기디온

G3?

by 곽제가 2021. 7. 25.

G3-1

 

기디온 하퍼 블랙허스트의 여남은 이야기

배경음악은 없소

좋아하는 것을 찾아 들으시길

 

 

 

 

하루 동안 수척해진 얼굴에서 더이상 윤이 나지 않았다. 깨진 창문에 얼굴을 유심히도 들여다본 기디온이 가장 먼저 한 생각이었다. 몸에서 기름이 말랐으니 이제 피가 말라붙을 차례인가. 

 

“신체강화.”

 

피아도 구분 못할 지능이던데 이걸 데리고 무슨 전쟁을 하겠다는 거지. 혹시 나도 그들처럼 되어서 총알이 한번에 살을 찢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모르긴 몰라도 더럽게 아픈 건 확실할 거야. 남몰래 입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여전히 혀와 뺨의 안쪽은 부드럽다. 입천장도 손가락으로 긁었다. 살이 무르게 손톱을 따라 짓눌렸다. 그럼, 입안을 쏘면 확실하게 죽을 수 있겠군. 빗나가서는 안된다. 어려서부터 온갖 영화와 드라마로 자살 시뮬레이션에 단련된 미국인으로서 여기서 실패하기엔 자부심이 쩔어줬다. 그런 잡학 따위 알아봤자 뭐하겠냐만. 뭐 언젠가 살면서 자살 시도 한번쯤은 해봐야 세계 1위 부강국의 빈부격차로 내려앉은 국민의 도리 아니겠는가? 권총을 입안에 한번 집어넣었다. 길이도 맞았다. 권총자살. 꼭 젊은 베르테르 같잖아. 노란 조끼를 챙겨 입고, 권총은 빌려달라고 할 걸. 그리고 누군가가 왜냐고 물어본다면 “긴 여행을 하려고 하오.” 라고 대답하고.

 

그는 그렇게 자신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한가로운 길가의 긴 그림자가 유령처럼 주위를 거닐었다. 하늘이 맑다. 바야흐로 춘삼월이다. 꽃이 피고 고양이들이 새끼를 낳아서 모르는 고양이들이 뒷뜰에서 풀을 뜯어먹는 봄이다. 겨울이 아니어서 다행이다. 겨울은 너무 가혹해. 천국이나 지옥에도 법이나 규율이 있다면 사람이 겨울에 죽지 않게 하는 법이 새로 생겨야 한다고 본다. 그림자가 몸을 숙인다. 손가락이 흔들리는 풀에 끝을 대었다. 이들은 아무것도 신경쓰지 않는다. 기디온이 콧속 깊이 산패한 냄새를 들이마셨다가 도로 천천히 뱉었다. 때마침 구름 사이로 숨어들려는 햇빛이 넓게 들어와 그의 얼굴을 드리웠다. 아! 벤치가 있군. 그는 끝내주는 기회주의자다. 사양하지 않고 앉았다.

 

어머니는 차가운 사람이니까 약간 슬퍼하고 오래 분노하겠지. 그래도 형이 있으니 적어도 한 명은 남았군. 그리고 형은 약간 멍청하지만 희망적인 편이니까 많이 슬퍼해도 내가 죽지 않았다고 생각하겠지. 둘이 붙여놓으면 볼만 하겠다. 비꼬는 말은 아니다. 정말 그럴 것이다. 나 하나를 잃어도 얻은 것으로 하여금 나머지 시간을 견디면 된다. 그러니 이 둘은 별로 걱정하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나는 차가운 여자가 취향인가봐. 이걸 거의 쉰 줄은 되어서야 깨닫다니……

 

그는 예전부터 아침이 좋았다. 아침 특유의 물기어린 냄새가 있다. 물 한 모금만 마실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텐데. 괜찮다. 혼자 죽으면 미치도록 깊은 고독 속에 서서히 익사하고 말 줄 알았는데, 하늘이 이리도 밝아 허름한 도시에서도 광채가 나니 그러기도 어렵다. 썩어가는 몸을 견딜 필요 없는 것만이 내가 가진 행운이다. 평생 행운아로 살았다. 이만하면 그만 해도 된다. 그래도 투명한 눈물이 뺨을 타고 턱에서 모여 떨어진다. 이제 다신 아무도 볼 수 없어. 사실 이렇게 죽고 싶지 않았어. 나는 영원토록 빛나고 싶었고, 누구에게도 미움받고 싶지 않았어. 하지만 그렇게 되었어. 내 이름은 기디온 하퍼 블랙허스트. 퍼스트 네임은 구닥다리고, 미들 네임은 어디에나 있을 법하지. 그래도 누군가가 내 이름을 기억해주기를.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것을 바라잖아.

 


 

사랑하는 신시아에게

 

신시아, 나 네 십대 소녀 시절을 다시 한 번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아름답고 너는 똑똑했지, 그래서 네 곁에 있는 나는 한결 멍청해 보였고 내 곁에 있는 너는 더욱 못나 보였어. 그래도 그랬기 때문에 난 너와 있는 것이 재미있었어. 만일 내가 그 철없던 17세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너에게 “외모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으니까 네 삶을 살아” 라고 말해 줄텐데. 쥐파먹은 머리카락을 짧게 집어 놀리지 않고 책상에 엎드려 자느라 침이 묻은 얼굴을 찍어 도망가지 않을 텐데. 신이 난 채 여자친구 이야기를 하지 않을 텐데. 네가 나를 바라보는 것을 일찍 알아챘을 텐데. 

 

그래서 다시 한번 보고 싶어, 신시아. 네 십대 시절을. 우리의 지나갔지만 유치하고 바보 같았던 삼십 년 전을.

 

네 운명이 내 것처럼 슬펐던 적이 있었지. 아주 작고 말랐던 우리는 네 부모님이 볼 수 없는 곳에 앉아 젤리의 개수를 헤아렸지. 조금 커서는 네 할머니의 집으로 도망가서 푸딩을 먹었지. 또 더 자랐을 때엔 우리 사이에 약간 내외하게 되어서 말을 아꼈던 때도 있었지. 그래서 우리는 살짝 서먹해졌다가 또 시간이 지나서야 예전 사이로 돌아오고 말았어. 

 

아, 내 착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설마 그때부터 나를 좋아한 건 아니신지? 박사님? 선생님? 저기요?

 

농담이야.

 

농담이라니까!

 

네가 내 생각을 조금 덜 했으면 좋겠어.

지금 내 꼴이 음. 좋은 구경이 못되거든. 음. 그래. 아주 훌륭하고 완곡한 표현이었어. 나는 아마 오래 살지 못할 것 같아. 너는 내게 기다리라고 했는데, 나 네게 돌아갈 자신이 없어. 이 병이 치유된다면, 그렇다면… 그것이 내게는 발병하지 않더라도 네게로 가면 어떡하지?

 

내가 사람을 물었어. 이건 도저히 보기 좋게 표현할 방법이 없었어. 그냥 네가 거기서 안전했으면 좋겠다. 아무도 날 구하러 오지 않는 걸 보니 신시아 너 명성을 조금만 더 날리지그랬어? 뭐, 괜찮아. 

 

괜찮다니까.

 

신시아. 내 생각을 조금 덜 해.

그렇게 약속해.

사랑해. 다치면 안 돼.

 

기디온으로부터.

 


 

입천장에 차가운 금속이 부딪혔다.

한 번 더 부딪혔다.

그 다음 이야기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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