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0/하스마

뻗지 못한 수평선

곽제가 2021. 7. 25. 23:16

하스마&몽블랑 신동사AU(절망편)

 


 

뻗지 못한 수평선

 

 

“삶의 어느 법정에서건…

나는 그녀를 위해 증언할 것이다.”

 

 

 


 

하스마는 울었고 겁에 질려 있었다. 모르는 언어를 하스마에게 쏟아낸 분홍색 피부의 때깔 좋은 미국인들이 그를 창문도 없는 좁은 방에 가둔 것이다. 하스마는 분명 동네에 있었는데 이들이 하스마를 납치해 며칠간 끊임없이 분홍색 손에서 다른 분홍색 손으로 옮겨갔다. 끈질기게 매일매일 울기밖에 할 일이 없었다. 그래서 하스마는 그렇게 했다. 그나마 하스마의 프랑스어에는 대답하는 사람이 좀 있었는데 집에 보내 달라는 말을 오십 번쯤 반복했던 것 같다. 물론 아무도 듣지 않았다. 방을 둘러보자 침대가 두 개 있었고 창가의 침대에 여자아이가 한 명 있었다. 아프리카 대륙은커녕 카사블랑카 밖으로도 나가본 적 없는 하스마의 눈에도 그 애는 많이 추운 지방에서 왔을 것만 같았다. 생김을 말하자면 새까만 머리를 쫑쫑 양 갈래로 늘어지게 땋고 빨간 눈이 양순하다. 하스마가 입을 열려고 했지만 그 애가 더 빨랐다.

 

“네 이름은 뭐니?”

 

그러는 네 이름은 뭐야? 넌 누구야? 여긴 어디야? 저 사람들은 누구야? 넌 왜 안 울어? 여기 오래 있었어?

 

… …

 

“하스마.”

“나는 몽블랑.”

“여긴… 어디야?”

“스큅을 마법사로 만드는 연구소야. 봐.”

 

조금 투박하고 리듬이 분간하기 힘든 프랑스어였지만 하스마는 그 말을 쉽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몽블랑이 바로 팔뚝을 걷어 보여줬기 때문이다. 아물었거나 이제 아물려는 구멍이 많이 나 있었다. 손목엔 묶인 자국이 선명했다. 터무니없이 약하고 가느다랬다.

 

“우, 우리 할머니는 오러야. 날 데리러 오실 거야.”

“아무도 못 나갔어.”

 

하스마가 입을 다물었다.

 

“다들 그랬어.”

 

절망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몽블랑은 다가가서  털썩 쓰러진 하스마를 잡고 일으켰다. 어두워서 잘 몰랐는데 하스마는 키가 컸다. 그리고 이미 눈가가 짓물렀는데도 또 울음을 터뜨렸다. 몽블랑은 하스마가 조금쯤 신기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날은 많이 덥지 않은 날씨였던 것 같다. 하스마 마맛 드리시가 파란 하늘 흰 구름 아래에서 사람이 여기저기 묻어 있는 거리를 거닐고 있었다. 딱딱하고 날렵한 구둣발 아래로 손가락 하나가 포도알처럼 납작 눌렸다. 끔찍했다. 마법 범죄답지 않게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현장에서 하스마는 눈썹 한번 찡그리지 않고 보고서를 넘겼다. 노마지 사회의 바보들은 이 눈알 두 짝 서슬 퍼런 아랍인 여자를 꺼리고 어려워해서 그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을 수 있었다. 하도 구부정해서 아주 수그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덩치 큰 남자가 안절부절못하며 다가온다. 사람 머리통만 한 손바닥을 습관처럼 비비던 그는 무척 조급한 성격으로 얼마 기다리지 못하고 하스마를 불렀다.

 

“선배님.”

 

대답이 빠르다.

 

“왜.”

 

남자가 허리를 조금 더 숙였다.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이는-제 딴에는- 모습을 옛정으로 참고 넘긴 하스마가 읽고 있던 보고서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몽블랑이 다시 탈출했다.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어떤 사람은 알다시피 하스마는 순간이동 특화 마법사였다. 미국을 다소 가로지르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스마가 겨우 잠들락 말락 하고 있었다. 바싹 마른 이불이 따스했고 달빛은 절묘하게 눈가를 비껴 벽을 비추었다. 몽블랑이 하스마의 어깨를 조금 흔들었다.

 

“하스마, 우리 도망가자.”

 

눈을 뜨니 토끼처럼 빨간 눈이 결연에 차 있었다.

 

“우린 아무 데도 도망 못 가. 몽블랑, 알잖아. 우리가 아무리 멀리 도망쳐도 돌아오게 되어 있어.”

“패배주의야.”

“우리가 선생님 말처럼 마법사가 되면 그땐 어디로든 갈 수 있을 거야.”

“그래도…”

“그래도?”

“여기 하늘이 너무 넓어서 우리 자리가 하나쯤은 있을 것만 같은 걸.”

 

시설의 새벽이 창문을 타고 두 꼬마에게 찾아들었다. 하스마는 그래도 오늘은 자자고 말했다. 너무나도 힘든 하루였다.

 

한 달 후 하스마와 몽블랑은 청소도구함에서 빗자루를 훔쳐 하늘을 날아 도망쳤다. 당연히 그날 잡혔다.

 


 

몽블랑은 마법형질발현연구소의 대표적인 골칫덩어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몽블랑을 처리하지 못했으니 이것은 참으로 부덕의 소치다. 하지만 이미 어린이 수십 명의 시체를 치운 연구소가 마법사가 된 몽블랑을 죽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군인으로서는 너무나도 훌륭한 무기이고 그야말로 세기의 걸작이었다. 마법형질연구소는 결국 살아남아 마법사가 된 스큅들이 진짜 스큅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순순히 인정할 수 없었다. 뭐, 다행스럽게도 정부는 자기들 손에 확실히 제어할 수 있는 마법사가 있다는 사실을 좋아했다. 하스마는 이리 가라면 가고 저리 가라면 저리 가라는 어른으로 자라났기에 몽블랑처럼 주기적으로 기억이 지워지며 냇물에 떠내려가는 나뭇잎처럼 살지는 않았다. 하스마는 생김새와 다르게 어려서부터 대체로 고분고분했다. 몽블랑은 빼어나다 못해 두려울 정도로 강력한 마법사가 되었다. 그것 말고는 설명할 단어가 없었다. 만화를 많이 본 어떤 사람은 몽블랑이 눈앞의 허리케인을 뒤로 무르는 모습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미국이 인간 병기를 길렀군요.”

 

그때 몽블랑은 무슨 반응을 해야 할지 몰라 입술을 앙다물었다. 아마 네 번째로 기억을 소거당했을 때였을 걸. 몽블랑은 기억을 잃어버리고 있을 땐 정말이지 아무것도 몰랐다. 새 인생을 몇 번이나 시작했는지 모른다. 매번 의사를 가장한 사람들이 위대한 스토리텔링으로 몽블랑의 정신을 교묘하게 조작했다. 몽블랑은 가끔 아이가 있는 엄마였고 아니면 사랑받는 딸이었다. 연고 없는 무산자거나 아니면 부잣집 아가씨였다. 얼마나 있었는지는 다 기억하지 못한다. 몽블랑은 언제나 기억을 잃어버렸으니까. 네… 아, 그렇군요. 저는 그런 삶을 살았군요. 어쨌든 전 마법사라고요. 네? 제가 도움이 될 수 있다고요? 저는 이제야 막 깨어났는데… 괜찮을까요? 하지만 몽블랑은 언제나 하스마를 찾고 시설을 기억해냈다. 그러고 나면 몽블랑은 꼭 사고를 쳤다. 일단은 사라졌다. 그러고 나면 하스마가 움직였다. 몽블랑은 어디로든 갈 수 있었다. 보통은 백인 여자가 있으면 안 되는 곳으로나 갔다. 한번은 파리의 카페에 있었고, 세르비아에도 한번쯤 나타났다. 하스마는 몽블랑을 따라다니며 우리는 이렇게나 세상을 돌아다니는데 왜 부모도 가족도 찾을 수 없을지 궁금해하곤 했다. 몽블랑을 오래 알긴 했지만 아직도 몽블랑을 보면 속에서 물음이 자꾸 치솟았다. 가령 지금 참지 못하고,

 

“하다못해 이젠 아무나 죽이는 거니?”

 

라고 물은 것처럼.

 

신문 속에서 본 얼굴이 바닥에 널부러져 있었다. 몽블랑이 사람을 죽였다. 몽블랑은 이번에 기억이 소거된 이후로는 하스마를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 먼저 하스마가 누군지 아냐고 하스마에게 물어본 다음엔 자신이라고 시인하자 진위를 확인하려고 들었다. 차츰 기억이 나는 모양인지 몽블랑은 곧 ‘하스마, 너구나.’ 라며 기뻐했다. 재차 따져 묻자 그가 띄엄띄엄 특유의 뜬구름 잡는 표정으로 대강의 일을 설명했다. 아니, 몇 개의 문장으로 하스마가 알아서 알아들은 것이나 진배없었다. 이 노마지 남자가 문카프 서식지를 밀어버리려고 했다. 마법 세계를 아는 남자고, 문카프의 존재를 알면서도 추진했다. 그래서 몽블랑이 직접 남자를 허공에서 바닥으로 밀어버렸다. 그러니까… 한 5m 높이 즈음에서. 사람은 50cm 높이에서도 잘못 떨어지면 죽어버리고 마니 남자의 죽음은 섭리나 다름없었다. 하스마가 조금 울었다. 이번엔 몽블랑이 어떻게 될지 정말로 알 수 없었던 것이다. 몽블랑은 여태까지 너무도 많은 처벌을 받아왔다. 의사봉으로 판때기 대신 머리를 두드렸으면 벌써 구멍이 났겠지. 이번엔 진짜로 잘못될 수도 있었다. 몽블랑은 이젠 하스마보다 조금 커서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몽블랑 잘못 아니에요.”

“그럼 네가 했다는 거니?”

 

영겁의 시간이 흘렀다.

 

“네. 제가 했어요.”

“그렇구나. 말해줘서 고맙다.”

 

싱거운 미소로 여자가 하스마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여자는 성대에서 침 끓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 모습이 못내 꺼림칙스러워 반걸음 뒤로 물러난다. 하스마의 뒤편에는 거대한 무기고가 테디베어 박물관이 되어 털과 먼지를 들숨과 날숨에 토해내고 있었다. 여자는 하스마와 몽블랑이 자랑스러웠다. 몽블랑은 이제 여자에게서 벗어날 수 없고, 하스마는 그런 몽블랑을 지켜줄 것이다. 감격에 차올라 거의 눈물도 났다. 물론 두 아이의 눈에는 여자가 미쳐 보였으므로 그냥 신발코가 서로 닿게 발을 움직여 위안을 찾았을 뿐이다.

 


 

허공에 목소리가 나타났다. 

 

“몽블랑 델피는 어디에 있습니까?”

 

섬뜩한 목소리에 어깨가 들썩인다. 미스 맥카시가  물고기처럼 튀어오르는 어깨를 갈무리하고 옆을 돌아보았다. 하스마 드리시가 그 앞에 서 있었다. 작은  체구의 여자는 금방이라도 맥카시를 푹 찌를 것처럼 지팡이를 들고 서 있었다. 사람을 후비려고 갖고 다니는 물건이 아니라는 걸 아는데도 무서웠다. 맥카시는 이 규칙을 얼기설기 기워 세운 법정의 마지막 입회인을 위해 의자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어드리겠습니다.” 

 

문이 충분히 열리기를 기다려 들어간다. 파랗고 붉은 시선이 마주쳤다. 몽블랑 델피가 사슬이 쩔렁이는 손목을 코까지 들어 올리고 인사한다. 하스마는 뻔뻔스레 마주 손을 들거나 총알처럼 꽂히는 시선에 머쓱한 기색도 없이 법정을 가로질렀다. 이 법정엔 판사도 검사도 없다. 방청석엔 먼지가 쌓이고 판사석엔 국방성의 대리인이 피곤하게 서 있을 뿐이다. 실은 이건 법정조차도 아니다. 실은 몽블랑도 사람이 아니지. 몇 장의 종이로 이루어진 가짜인간, 기록에 따르면 가엾게도 미쳐버린 젊은 아낙일 뿐이다. 한 끗 차이로 몽블랑은 병기거나 요원이었다. 전자는 입을 열면 안 됐고 후자는 신발을 신을 권리가 주어졌다. 말 그대로였다. 하스마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조금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몽블랑이 손톱으로 탁상을 두드렸다. 그가 약간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사건 번호가 여섯 자리던가? 따라잡으려면 멀었네, 그렇지?”

 

뭘 따라잡을건데? 엄중한 외침이 끼어들었다.

 

“4월 14일, 살인 혐의에 대한 몽블랑 델피에 대한 심의를 시작하겠다. 피고, 출석하였나?”

 

몽블랑이 웃음기 없이 대답했다. 네. 하스마는 아직 대답할 차례가 오진 않았지만 속으로 대답했다. 네. 이젠 더이상 발끝을 닿을 만큼 가깝지도 않고 그는 나를 완전히 기억할 만큼 성하지도 않지만 나는 이곳에 왔습니다. 그를 위해 증언하기 위해 왔습니다. 나는 삶의 어느 법정에서건 그를 위해 증언하러 올 것입니다. 나는 그러기로 했으니까요. 약속도, 맹세도 아니라 그냥 저 혼자 한 생각일 뿐이지만요. 그냥 그러기로 했습니다. 내게 남은 건 그런 생각뿐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