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11
하스마 성인 로그
중얼거리는 소리가 파문을 일으키며 퍼져나갔다. 머리와 가슴과 말이 맴도는 혀의 언덕에. 하스마가 서 있는 곳은 공교롭게도 모로코 선수촌의 여성 휴게실이었다. 이곳엔 하스마의 친구보다 스포츠계에 땡전 한 푼 쓴 적 없는 돈줄을 타고 이 위로 새처럼 내려앉은 하스마를 의심하고 시큰둥해하는 사람이 다수였기에 누군가 구태여 대꾸하지는 않았으나 모두 그 말을 듣고 입가를 떨었다. 몇 명은 감쳐문 입술을 깨물지 않기 위해 의식적으로 입을 벌리기도 했다. 서리처럼 머리에 낀 하스마의 문장은 이랬다.
“내 육체는 극복해야 하는 것이 아니야.”
하스마가 넘기지 않은 신문을 내려놓았다. 이상한 데서 아날로그라니까. 아직 마법사 세계에는 종이가 대세였기에 하스마는 신문만큼은 종이로 보기를 선호했다. 이 공간에 자리한 사람들은 동시에 같은 생각에 골몰한다. 날숨이 한탄처럼 크게 들렸다. 한참이 지나자 간신히 모가지를 빠져나오는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맞아, 네 말이 맞아…”
신문 헤드라인에는 <카사블랑카가 낳은 처녀, 타고난 피지컬 극복하고 남성 기록 웃도나> 라고 적혀 있었다. 변명의 여지 없이 틀려먹은 문장이다. 헤아릴 수 없는 규모의 독자가 이 글을 읽겠지. ‘극복’ 할 게 따로 있지!
그야말로 완전한 기만이었다.
운동이란 게 보통 그렇지만 팔다리가 길어야 보기도 좋고 자신도 몸뚱어리를 주체하기 쉽다. 요트에는 남녀가 없다고 하지만 힘이 필요하지 않은 종목이 결코 아니다. 요트 선수들이 견디는 훈련은 웬만큼 건장한 남성에게도 벅찬 것이다. 하스마는 팔다리가 긴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게를 위해 새처럼 가벼운 것도 아니다. 그냥 운동 선수의 생김새가 아니다. 평범하게 살집이 있어 보이는 몸이다. 피부가 거칠고 손가락은 다 터 있기에 그저 험한 일을 하나 싶을 뿐. 하스마는 하다못해 아낙네 소리까지 들어본 적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근육이 그림으로 그린 것처럼 확 드러나려면 지방 없이 아주 말라야 하는데, 그러려면 체력을 포기해야 하죠’라고 설명했다. 이골이 난 설명이었다. 그래도 아낙네는 사정이 낫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SNS의 괴물들이 하스마의 몸매를 두고 어찌나 씹어대는지 안다면 누구나 기절초풍하겠지. 처음엔 분노했으나 모든 감정은 시간에 흐려진다. 이젠 다짜고짜 인신공격을 받아도 마주친 적 없는 것처럼 지나간다. 속으로는 구구절절하게 욕하긴 한다. 한번 엿보도록 할까?
‘응, 근데 난 운동해서 뱃살 없고 너는 삼겹살임~ 나는 마법사에 국가에서 식단관리해서 성인병 걸리려면 70년 걸리지만 넌 아님~ 넌 장수하려면 장수거북이 되는 수 뿐~ 게다가 이름도 개구림~ 더욱 슬픈 건 나는 돈 많고 너는…’
그만 보자. 세 살 버릇 여든 간다고 적어도 여든까지는 저러고 살 듯. 뒤끝 하나는 오라지게 작렬. 차라리 화를 내지 화 안 내고 영원히 불타오르는 백색왜성. 하스마, 차라리 고소를 하지 그래? 그치만 유난이라고 또 욕 먹을까봐 싫댄다. 메달리스트에게도 이런 고충이 있다. 하다못해 역도 선수도 힘쓰기 전에는 근육이 안 드러난다. 근데 하스마한테만 저런다. 버거운 일이다. 오죽하면 마인드 컨트롤을 하랬더니 요가 중에 인대가 나갔다. 하스마는 인대가 나가서 요양하는 사이(곧바로 나으면 이상하니까 하루 놀았다. 만세!) 명언을 하나 되새겼다.
하스마의 할아버지는 아주 많은 말을 했는데, 개중 하나가 명성과 골은 같이 다닌다는 것이다. 참고로 할머니는 돌아가셨으며 외가 쪽은 이런 방면에선 도움이 전혀 안 된다. (외조부는 모로코의 유복한 순수혈통 가문의 막내-우웩! 자기도 그게 싫어서 도망친 뒤 비마법사와 결혼했다-티를 내는지 뭐만 하면 죽여버려야 한다며 혀를 찼고 외조모는 ‘싫은 사람에겐 괜히 미안해지게 파이를 선물로 주렴. 스투페파이라는 게 효과가 좋다며?’ 라고 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뭐 스투페파이를 먹으면 엄청 미안해지긴 하겠다. 물론 스투페파이가 뭔지 알고 하시는 소리다.) 그래! 명성과 골은 같이 다녀!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나는… 공인이다…! 유명하니까 욕하는 거야…!
근데 대중은 그래도 언론사는 그러면 안 되잖아.
언론사만큼은 하스마를 운동선수 그대로 바라볼 수 있잖아. 그들은 배울 만큼 배운 사람 아닌가.
<카사블랑카가 낳은 처녀, 타고난 피지컬 극복하고 남성 기록 웃도나>
쓰레기 결탁의 장이야.
갈색 눈의 여자가 컵을 콱 소리나게 내려놓았다. 유리 손잡이에 금이 가서 내려놓자마자 버리려고 들어올려야 했다. 그녀는 손바닥에 실금이 가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각양각색에 체형도 성향도 조금은 종교도 정치색도 모두 다른 여자들이 같은 이유로 침묵하고 있다. 이 상황에 분노보다는 불편을 느끼는 사람도 있었다. 한 명씩 자리를 뜬다. 이런 일에 열중하기엔 경기가 남은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모두 알았다.
이건 철저한 조롱이라는 것을.
올림픽 폐막식의 끝의 끝까지 지킨다. 그동안 찰나라도 빠짐없이 웃고 있어야 한다. 하스마에게는 특히 카메라가 더 따라붙었다. 하스마는 카메라를 위해 유약해 보이는(돌려 말하면) 미소를 교정했다. 이를 벌리지 마, 눈을 감으면서 웃지도 말고. 왜 그래야 하지? 하스마는 조명과 음악과 아수라장이 끝나서야 밖으로 빠져나왔다.
“드리시 씨 어디 가셨지?”
“여기 있었는데…”
응, 거기 없어요. 잡을 수 있다면 잡아 보시지! 지팡이를 빼어든 마법사는 천하무적이라! 아, 물론 그냥 뛰어갔다. 도심에서 마법 쓰다가 곧장 끌려갈 일 있나.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죄로 봉사라도 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을 차치하더라도 하스마는 양심101%의 인간이라서 모자를 뒤집어쓰고 호텔로 달려갔다. 당장 이곳을 떠나고 싶지만 방금 리우데자네이루에 있었는데 이따 프랑스에서 발견되는 불상사는 일어나서는 안된다. 그래서 하스마는 그저 호텔로 조촐한 짐을 옮겼다. 핸드폰 충전기와 옷 몇 벌. 이 마련은 언제 어딜 가든 동일하다. 체크인을 하는데 직원이 이걸로 짐은 끝이냐고 물었다. 프로페셔널한 모양인지 하스마가 뒷머리를 긁자 포커페이스로 알겠다고 하더라. 눕고 싶다. 죽어도 침대에서 죽고 싶다. 침대에서 죽는 게 최고의 호상이다. 하스마가 침대 위로 기어올라가 몸을 웅크렸다.
쉴 때조차 편하지 않다. 하스마는 그렇게 표류하는 돌뗏목처럼 한참을 누워 있었다. 여행을 하면서도 이렇게 갇혀 산다. 우리 안의 짐승은 나가려고 쇠라도 이빨로 갈아마시려 애를 쓰는데 하스마는 그냥 가만히 있었다.
“씨발.”
참고로 영어로 말했다. 아랍어로 말하기엔 너무 강한 단어였다. 마음이 풀리는 기분을 느낀다. 그것 하나만으로 충분했다. 한숨 자고 나면 모두 잊을 수 있겠지. 천천히 눈을 감는다.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은 하스마에게 있다. 그 누구도 맡아주지 않는다. 계속 생각날 때마다 그 단어를 지껄이며 하스마가 방을 가로질러 머리를 감고 이를 닦았다. 화가 또 치밀길래 세수도 했다. 냉수마찰이 필요한가 싶어서 샤워도 했다. 하다가 추워서 따뜻한 물로 돌려서 그런지 아직도 짜증이 난다. 결국 하스마가 최후의 보루를 꺼내들었다.
“진짜 세상 씨발…”
역시 고통을 잊는 효험이 있는 단어다. 모국어로 말하니 확실해진다. 그제서야 하스마가 잠에 든다. 남은 기억을 창밖으로 내던져 버리며. 오늘은 더이상 소모하지 말고 내일을 위해. 모레를 위해. 친구들을 만나러 갈 9월 1일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