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우스 네예스타니의 인트로 로그
01
필요할 때가 아니면 주의력이 떨어지는 다리우스를 먼저 발견한 건 물론 샤자르였다.
“넌 여기 무슨 일이냐? 콩고물이라도 주워 먹으러 온 모양이지?”
“아무리 황궁이라도 아무거나 주워 먹으면 탈이 납니다.”
심드렁하다. 시건방지다. 재수 없다. 수틀리면 손이 먼저 나가는 세르메네스 비공식 인골분쇄기 앞에서 당당하게 뱉을 법한 말은 아니다. 하지만 인골분쇄기도 한 인물 했다. 그리고 다리우스의 어처구니없게 만드는 화법에 익숙했다. 고의는 아니다. 다리우스가 들으면 항변하겠지. 묻길래 대답한 것뿐인데 도무지 뭘 바라는지 잘 모르겠다며. 샤자르가 씨익 입꼬리를 올린다. 다리우스도 사람이라 상대방이 웃으면 기분이 참 좋아진다. 조금 입꼬리를 올렸다. 그로서는 거의 박장대소에 해당하는 움직임이었다.
“아, 탈 나지 않게 조심해라.”
그의 고개는 주둥이와는 다르게 예의를 알고 점잖다. 용무랄 것도 없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공사가 다망하신 자하르 님께옵서 자리를 떠난다. 남겨진 사람이 생각한다. 지금 나한테 뭘 돌려 말한 건가? 잘 모르겠는데. 하지만 언제나 탈이 나서 다리우스를 찾아오는 건 샤자르가 아니던가? 내일 숙취로 기어오면 반드시 말해줘야겠다.
01-2
“선생님, 왜 반지며 팔찌며 모조리 빼십니까? 하도 빼지 않으셔서 저는 사랑의 증표인 줄 알았습니다만.”
다리우스의 하인 야밀이 놀리며 그의 차림에 알은체했다. 그러자 다리우스가 웃지도 않고 머리카락을 앞으로 넘실 빼고는 목걸이도 상자 안으로 집어넣었다. 완전히 닫으려고 했으나 상자 안쪽에 덧댄 쇠징이 달각달각 잘못 맞물리는 소리를 냈다. 시행착오를 세 번쯤 겪고서야 그것을 완전히 닫을 수 있었다.
“전 그 어두운 데서 혼자 반짝이고 싶지 않거든요.”
조금의 빛이라도 아주 환상적으로 정반사해줄 금품을 들고 들어가기엔 다리우스의 무력이 하잘것없다. 그는 무엇이든 빠르고 잽싸야 하는 일에는 재주가 영 없었다. 그가 능히 하는 일이란 야금, 상감, 접골, 도색, 점토 성형, 주조酒造, 직조, 필사, 조리가 있겠으며 그렇지 못한 일에는 대표적으로 타격이나 창술과 댄스를 비롯한 에너지 넘치는 활동과 마지막으로 무엇이든 즉석에서 꾸며 말하기가 있겠다. 다리우스가 왜 평생 거짓말을 하기로 결심했는지는 그조차도 잊었다. 그는 그때의 일에 관해 별로 생각하지도 않았다. 채비를 끝낸 다리우스의 차림은 좋게 말하면 홀가분하다. 그는 그대로 나와 생물학적 아버지를 찾아가 성의 없이 금품이 가득 든 상자를 내려놓고 약을 종류별로 챙겼다. 오늘 일정은 고작 여기에서 저기로 가는 말장난에 불과했다. 그는 나자르에 살고 있으니까.
“환금성이 좋은 것만 골라 담았어요. 제가 죽으면 갖지 말고 어머니를 주세요.”
마수드의 얼굴이 침통했었나? 신경 쓰지 않는다.
03
우연이었다. 아니면 우연이 아닐 수도 있겠다. 아니, 우연이라고 생각하자. 아마 면식 없는 사이여도 도와줬을 테니까. 신발 신은 것들만 지나갈 수 있는 길을 말을 타고 가로막은 귀한 집 아가씨의 존재는 여간 바쁜 게 아닌 나자르 백성들에겐 곤란하기만 한 존재였다. 게다가 외국인이라니! 말이 뒷걸음질 할 줄 알았더라도 비키기가 쉽지 않은 그 길목에서 다리우스가 그 고삐를 잡아챈 것은 그러니까 우연이 아니라고 하자. 찬란한 역광 때문에 고개를 쳐들어도 얼굴을 보기 힘들었던 아가씨의 이름은 바로 레일라였다. 특유의 철면피와 심드렁한 어투로 인파를 헤치고 레일라를 구출한 뒤 도주하려 했으나… 잡혔다. 보다시피.
그는 대개 생긴 대로 놀지만 사실은 말이 많은 사람이 싫지 않았다. 싫을 이유가 없으니까. 레일라는 알고 싶은 것이 많아서 다리우스에게 많은 것을 캐물었다.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눈 감고도 다니는 길이라 생애 최초로 모든 질문에 족족 대답할 수 있었다.
“바자르는 여기까지입니다. 여긴 주택가가 있고 저쪽은…”
아무것도 없는데 무슨 말로 포장하지? 말문이 막힌 다리우스의 말이 입이 다물리기도 전에 레일라가 갈림길에 굳이 아무것도 없는 방향으로 말머리를 틀었다. 자연스럽게 팔이 당겨져서 그 또한 뜻하지 않게 성큼 발을 내민다. 어쩔 수 없다.
“거긴 아무것도 없지만 알겠습니다.”
두 그림자가 떨어지고 겹쳐진다. 나자르를 노랗게 빛내는 작열하는 석양이 두 사람의 그림자를 한없이 늘이고 있었다.
05
수반에 손을 씻다 말고 얼굴을 비추어 보았다. 물에 빠진 머리카락을 갈무리할 생각도 하지 않고 보라색 눈을 오랫동안 응시한다. 일어나자 가슴께부터 옷자락이 척척하게 젖어 들어갔다. 개의치 않는 성정이므로 곧장 태양으로부터 비껴 걸어갔다. 하리얀카 사람들 쪽엔 진정한 돈귀신 파샤 바르달리아가, 세르메네스 사람들 쪽엔 꼬마 도련님이었던 베임 키안이 있었다. 둘 다 썩 마주치고 싶지 않다. 파샤는 무섭고 베임은 꺼림칙하다.
그는 파샤의 무시무시한 시력과 예전부터 순수한 찬탄의 의미로 영리했던 베임의 기억력을 재보다가 시력에 손을 들어 주기로 한다. 그 나이대의 시력은 퇴화하기 어렵지만 어린애들은 빨리 잊으니까. 어릴 적엔 어른이라면 죄다 커다라 보이는 법이니 이 모습을 보고 까까머리 다리우스를 떠올리기란 쉽지 않겠지. 머리보다 무거울 성싶은 머리채와 새의 깃털처럼 파란 장옷을 휘날리며 베임을 지나쳤다. 더이상 꼬마 도련님이 아닌 베임은 흘끗 봐도 다리우스보다 훌쩍 컸다. 제법 사나웠던 아이가 이제 어엿한 청년이 되어 있다. 시선이 찰나다. 누구 한 명 서로에게 관심 두지 않았다. 여기서 사소하고도 별일 아닌 문제가 하나 있다면 무섭고 꺼림칙한 두 사람을 결국엔 한꺼번에 만날 미래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인데, 일단 상관없으니까 지금 당장은 지나가고 싶었다. 북적한 황궁에서 벗어나고 나면 무슨 묘안이 떠오를지도 몰랐다. 둘 다 머리를 쳐버리면 기억이 잊힐까? 그런 짓을 했다간 안 되겠지? 태양신이 불경한 기도도 들어주실지는 모르겠으나 돌아가는 길 내내 신에게 기도했다.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어쩌면 돌아올 때 마주치게 될지도. 파샤는 화통하게 농담하는 것을 대충 받아주면 알아서 넘어가게 된다. 베임은 마주쳐도 황송하다는 듯 고개를 숙여야겠다. 누가 오만하게 자라길 바라본 적은 난생처음이다.
06
다리우스는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 그 ‘소하 코로마’를 앞에 두고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 탐사대에서 피해야 할 사람 2위인가? 3위, 4위? 아니면 5위를 다투는…, 그래, 다리우스가 좀 잘못 살았다. 아마 그는,
“의원께서는 요즘 잘 지내시는지.”
라고 말한 것 같다. 주춤한다. 오래가지 않았다.
“예, 황궁의 보살핌에 모자람이 있겠습니까. 건강하셔서 기쁩니다.”
조아리지는 않았으되 적당할 만큼 정중하다. 생각을 읽어내기가 막막한 얼굴 아래가 반면 여러 소리와 온도로 들끓었다. 왜 온 거지? 별일 아닐 수도 있다. 언제 봤더라? 한 이 년 전쯤인가에 보긴 본 것 같은데… 더 전일 수도 있고… 왜 굳이 찾아와서 인사하는 거지? 단순 안부인가? 너무 예민스럽게 반응하고 있는 건 아닐까 몰라, 따위의.
막상 소하는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은데 괜히 온몸이 낱낱이 드러나는 착각이 든다. 두 눈은 불야성 같고, 여상한 목소리는 도깨비와 다르지 않다. 내리깐 눈을 천천히 들어올리면 평범한 사람이 한 명 서 있다. 그러나 진실로 평범한가? 소하의 차림은 요전처럼 짜임이 치밀하거나 아니면 반대로 손톱으로 긁으면 찢어질 것처럼 얇은 소위 귀한 천으로 겹겹이 싸여 있지 않다. 아름답고 광채 나는 것들이 하도 많이 눈 둘 곳을 따로 찾기가 어려운 이곳에서 유일하게 한 켠의 여백이 되는 소하는 한 장의 종이 같은 자태를 뽐냈다. 누군가가, 꼭 소하처럼 명징한 눈을 한 누군가에게 생애 마지막으로 글을 쓰게 한다면 두말 할것 없이 골라낼 단 한 장의 종이.
07
하염없이 멱이 잡혀 달랑거리고 있으려니 언제쯤 남자의 손에 힘이 빠질지 궁금해졌다. 이건 인체의 신비다. 이렇게 나이 많은 사람을 칠 수도 없고 예전이었으면 이런 늙은이쯤은 한 대 치면 넘어졌을텐데 지금은 장담할 수 없다. 나약하기 짝이 없는 육체가 벌써 피로를 호소하고 있었으니까. 황궁 어의가 서두를 ‘이 새파랗게 어린놈이 성취라고는 쥐뿔도 없는 게 돈독만 올라가지고 감히 황제의…’ 로 시작해서 ‘이 자식아’ 라는 다소 밋밋한 모욕으로 마무리하려는 찰나 우뚝 선 형체가 다리우스를 구명한다.
저 높다란 머리와 고귀한 얼굴! 중력을 전면으로 반하는 풍성한 머리카락! 3황녀이자 장군, 아사드 세르메네스!
재난과 구원 사이 어딘가에 있는 그가 몹시 흥미롭다는 얼굴-개미 행렬을 쫓아가는 어린애같은 표정으로 일단은 둘을 떼어놓았다. 당연하게 내팽개쳐진 다리우스는 황송하게도 아사드에게 인사를 올리는 영광을 입고 그 자리를 잽싸게 내뺐다. 그러고 보면 아사드와는 면식이 있다. 분명 예전에 저렇게 생긴 사람이 ‘파란’ 이라는 이름으로 찾아왔었지. 무서워서 몸이 다 떨린다. 물론 그의 영혼만 떨고 그릇인 육신은 한시바삐 걸음을 옮길 뿐이었지만… 본격적인 일정이 시작하기도 전에 내내 치이고 다닌 듯하다.
08
그의 생애에 단 한번도 돌아오지 않을
여태까지 일어난 그 어떤 일과도 다를
무엇도 비견할 수 없도록 신비롭고 아득할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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